곰배령 막걸리
둘 다 퇴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지루한 표정의 그가 말을 꺼냈다.
“그동안 너 뒷바라지하느라 힘들었으니 여행을 좀 다녀와야겠어.”
나보다 먼저 그만둔 그는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던 나의 삼시 세 끼를 챙겼다. 간혹 내가 설거지라도 하려고 하면 “바깥양반은 일에만 신경 써.”라고 하면서 집안일에는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했었다. 이런 그의 대접은 나의 퇴사 전까지로 기한이 정해진 것이어서 퇴사 후 고무장갑을 끼는 순간 그때가 살짝 그립기도 했다.
이렇게 24시간 동안 둘이 함께인 적은 처음이었다. 이런 시간에 적응하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해서, 우리는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헤맸다. 그러던 중 꺼낸 그의 말에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디 트래킹 할 곳 없을까?”
난 곰배령을 추천했다. 천상의 화원이라는 곰배령. 강원도에서 며칠 지내면서 곰배령과 인제 자작나무 숲을 다녀오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런데는 너랑 같이 가야지.”
이런. 그랬다. 우리는 둘 다 가보지 않은 장소는 함께하고, 혼자 여행을 할 때면 좋았던 기억이 있는 곳을 다시 찾았다. 딱히 그렇게 하자고 정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혼자 가면 두고 온 이가 생각나서 결국은 다음에 같이 가게 되니까. 그는 결국 곰배령 대신 광주로 떠났다.
그리고 8개월쯤 지나서 속초에서 한달살이를 할 때였다. 속초 관광시장에서 오징어순대를 먹으며 막걸리 한 병을 주문했다. 가게 주인은 속초 막걸리가 아닌 인제에서 만들어진 곰배령 옥수수 막걸리를 가져다주었다. 막걸리를 보면서 그 기억이 떠올랐다. “아, 속초에서 곰배령 멀지 않을 텐데. 곰배령 트래킹을 가야겠다.” 곰배령을 잠시 잊고 있었다. 이래서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바로 떠나거나, 적어놔야 한다니까.
곰배령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사전 예약을 해야지만 오를 수 있었다. 하루에 단 450명에게만 허락된다. 이 경쟁은 생각보다 치열했다. 가까운 날은 순식간에 예약이 가득 차서, 우리는 날씨를 예측할 수 없는 2주 후의 날짜를 선택했다.
드디어 곰배령 트래킹을 하는 날. 비 예보가 있어 불안했지만, 다행히 하늘은 아직 푸르렀다. 이런 하늘에 비가 내릴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등산로 입구에서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파란색 입산 허가증을 건네받았다. 곰배령 등산로 초입은 완만한 오르막으로 가볍게 오를 수 있었다. 계곡을 따라 숲길을 걷다 보면 ‘강선마을’에 도착한다. 강선마을에는 매점이 있었다. 각종 전과 막걸리를 파는. 보자마자 설렌다. “내려와서 요기서 막걸리 한잔 하고 가자!”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 길을 떠났다.
중간쯤을 지나면 본격 오르막이 시작된다. 점점 대화 소리 대신 사람들의 숨소리로 가득 찬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주변을 살피며. 오래된 나무들이 가득해 햇빛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늘진 바닥에는 온갖 양치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숲의 신비스러움을 더해준다. 어둑한 숲길을 한참 오르다 보면 멀리 빛이 내리쬐는 계단이 보인다. 저 계단만 올라가면 곰배령이 나올 거라고, 미리 예고를 해주는 것 같다. 가파른 계단을 하나씩 딛고서 마침내 나타난 곰배령. 해발 1,164m에 드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넓은 벌판. 얼핏 보면 푸르기만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사이사이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가득 피어 있다. 뭔지도 모르면서 사진을 마구 찍어댄다. 나중에 엄마한테 물어보면 다 알려줄 거라면서. (엄마는 등산과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웬만한 꽃 이름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엄마가 알려줘도 며칠 지나면 난 다 까먹어 버린다.)
그렇게 한참을 보내다 쉼터에서 미리 준비해온 김밥을 먹고 하산길에 나섰다. 하늘은 아직 맑았다. 내리막길, 이제야 올라오는 사람들이 헉헉 거리며 한 걸음씩 옮기고 있다. ‘그렇지 이쯤이면 가장 힘들 때야’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오를 때 헉헉되었던 기억은 까마득하고, 내려가는 길은 여유롭기만 하다. 입산 통제 시간이 있어 점점 올라오는 사람들의 수도 줄어들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 올라가면 통제시간 전까지 내려올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과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자, 천천히 올라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걸음이 조금 불편한 아빠를 딸이 부축하고, 가방을 멘 엄마는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아빠의 걸음은 느리지만 힘이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아빠, 괜찮아?”
“그럼, 그래도 올라야지.”
“힘들면 얘기해, 다시 내려가면 되니까.”
“응, 그럴게. 아빠 할 수 있어.”
비록 정상을 보지 못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지금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중요해 보였다. 마음을 다해 함께하는 시간이 있어 행복해 보이는 이들이었다. 가슴이 저릿해졌다. 우리는 과정보다는 결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는 한다. 회사에서는 그 과정이 어떠한지와 상관없이 결과만 가지고 평가를 하니까. 그렇기에 과정의 아름다움을 잠시 잊고 살아왔던 것 같다.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느리면 좀 어떤가.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또 어떤가.
은퇴 후 난 조급한 마음이 들었었다. 그래서 하고 싶었던 일을 동시에 쏟아내어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조금 알아가고 있다. 가끔 잊고 다시 성급해질 때도 있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그걸 깨닫기만 하면 된다. 깨닫고 다시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 일로 나를 탓할 필요도 없다.
타닥타닥. 빗방울이 나뭇잎에 부딪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늘이 맑아서 예보가 틀렸을 거라 생각하고 안심했는데, 일기예보는 정확했던 것이다. 마침 강선마을이 눈앞에 보였다. 강선마을에는 비를 피할 겸, 허기를 채울 겸, 곰배령을 올랐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도 빈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어, 산나물전이 있네.”
“감자전 시킬까 했는데, 산나물전 한번 먹어볼까?”
산나물전에 쓰인 밀가루는 나물을 뭉치게 하는 정도로만 쓰인 것 같았다. 바삭하면서도 나물 향까지 가득한 맛있는 전이었다. 둘러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산나물전에 곰취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가 주문할 때는 곰취 막걸리가 다 떨어져서 ‘곰배령 쌀 막걸리’를 마셨다. 재료는 다른 막걸리와 비슷하다. 단맛을 내기 위한 첨가물이 들어가 있지만, 많이 달지 않고 적당하다. 별다른 특징은 없지만 기분 좋게 넘어간다. 물맛이 달라서인가 뒷맛도 깔끔하다. 산나물전과 막걸리를 다 마시자 신기하게도 비가 그쳤다. 그와 함께여서, 단단해 보이는 가족을 만나서, 적당한때 비도 그쳐서 좋은 날이었다.
제조 : 인제 막걸리
원재료 : 쌀, 이소말토올리고당, 곡자(외국산 밀), 종국, 효모, 젖산, 사카린나트륨, 아스파탐
알코올 : 6%
유통기한 : 30일
특징 : 특징 있는 맛은 아니지만 단맛, 탄산이 아주 균형 잡힌 막걸리다. 물이 달라서일까 깔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