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위는 언제나 푸르다

무주 구천동 쌀막걸리

by idle

끝없는 우울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 우울의 끝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즈음은 날씨마저도 먹구름이 낮게 깔려있어 내 우울함을 더했다. 먹구름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이제는 그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 그런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우울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바닥에서 나를 끌어당겨 더 가라앉게 만드는 그런 날들이었다.


옅게 비가 흩날리던 날, 공항에 갔다. 예약한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바람이 많이 불어 뜰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비행기는 지연을 거듭한 끝에 몇 시간 후 탑승 안내를 했다. 거센 바람에 날개를 불안하게 흔들며 기체는 떠올랐다. 조금씩 조금씩 어두운 구름 속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구름 위로.


구름을 뚫고 올라가자, 구름 위는 파랬다. 위로는 파란 하늘, 아래로는 먹구름 사이를 날았다. 지면이 보이지 않아, 구름이 마치 땅처럼 보였다. 하늘 위도 끝없이 어두울 것만 같았는데, 구름 위는 파랬다. 그 순간 위로가 되었다. 내 우울에도 끝이 올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는, 나도 구름을 뚫고 올라가 파란 하늘을 볼 수 있겠다 싶었다. 별 것 아닌 그날 이후 난 조금 긍정적이 되었다. 다 지나간다. 이 힘든 시기도 언젠가는 지나가고, 좋은 날은 찾아온다. 끝없는 비극은 없다 생각했다.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나아졌다.




그와 덕유산을 오르기 위해 무주 구천동을 찾았다. 2박 3일의 일정이어서, 둘째 날 산에 오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도착한 날 비가 좀 날리기는 했지만, 곧 그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무주를 떠나는 셋째 날까지도 계속해서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그는 덕유산 등산 대신, 무주 구천동 어사길이라도 잠깐 걸어보자 했다. 어사길을 걷다 더 이상 걷기 힘든 날씨가 되면 되돌아오자고 말이다.


산자락 아래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먹었다. 산을 오르기도 전에 등산을 마무리한 기분이 드는 풀향(이라기보다는 참기름 향) 가득한 산나물에, 고추장, 계란 프라이가 올려진 비빔밥이었다. 그렇게 섬유질과 단백질, 탄수화물까지 꽉 찬 식사 한 끼를 마쳤다. 식사 후에도 여전히 계곡 사이사이 구름이 잔뜩 끼어 아직까지 덕유산 꼭대기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서서히 그 어두운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덕이 많고 너그러운 모산이라 하여 ‘덕유산’이다. 덕유산에는 이름처럼 산이 덕을 베푼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을 피해 산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왜군들이 지날 때마다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숨어있는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는 이야기. 짙은 안개도 안개지만 덕유산은 크고 깊어서 몸을 숨기기 좋은 산이라 생각됐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농민항쟁, 동학 혁명, 한일 의병과 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였다. 계곡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 흔적도 찾을 수 있었다.



높이 솟은 오래된 나무 그늘 아래를 걸어서인지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조금 넓은 계곡 길이 나타날 때면, 나무 틈으로 회색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보이곤 했다. 한참을 걸어 백련사에 다다랐을 때, 하늘의 면적이 조금은 넓어졌고,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백련사는 해발 900m에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이라고 한다. 백련사에서도 향적봉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고개를 들어 바라본 정상에는 여전히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정상을 오를 것인가.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맑은 날 다시 오자, 무리할 것 없잖아.”

“그래, 우리는 이제 시간 부자니까.”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흐리지만 언젠가는 맑은 날이 찾아올 테니 그게 꼭 지금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우리는 오른 길을 따라 아래로 다시 내려갔다. 나무 틈 사이로 내려오는 빛이 점점 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구름이 조금씩 걷히고 있나 보다. 거의 다 내려왔을 때쯤 오르는 길에서는 보지 못했던 휴게소를 보았다. 송어회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었는데, 파전과 막걸리도 같이 팔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한번 쳐다본 후 자연스레 휴게소를 향했다. 야외에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파전에 막걸리를 주문했다.



파전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휴게소에 있는 백구와 놀았고, 난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왔다. ‘난 고양이가 좋아. 개는 싫어.’라고 늘 말하는 그는 그 누구보다 개와 잘 놀아준다. 본능적으로 개가 좋아하는 놀이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는 한참 어린아이들이랑 잘 놀아주는 편이라 ‘놀이 삼촌’으로 불리기도 한다. 귀찮다고 말은 하면서도 놀이에 있어서 만큼은 늘 진심이다. 애 좀 보고 있으라는 말에 정말 보고만 있는 나와는 달랐다.


드디어 나온 파전은 내가 좋아하는 을지로 파전집 스타일로 계란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함께 나온 막걸리는 ‘무주 구천동 쌀막걸리’. 청량감 있는 막걸리를 좋아하는 편인데, 탄산이 많이 느껴지지는 않았고, 달달했지만 파전과 궁합은 좋았다. 가벼운 트래킹을 생각했으나 어느덧 산에 들어선 지 4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막걸리는 지쳐서 저릿한 몸을 나른하게 만들어 주었다. 기분 좋게 알딸딸해진 우리는 백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백구는 아쉬운 눈빛으로 천천히 꼬리를 흔들며 우리를 배웅했다.


덕유산을 내려오자 하늘이 맑게 갰다. 2박 3일의 일정 동안 한 번을 보지 못했던 향적봉이 보였다. 역시 구름은 언젠가는 걷히기 마련이니까.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흐린 날 이후에는 맑은 날이 찾아오니까.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등산은 하지 못했지만, 어사길은 비에 씻겨 싱그러웠고, 백구는 귀여웠고, 파전에 막걸리는 언제나 옳다!


구름 위는 언제나 푸르니까, 괜찮다!



무주 구천동 쌀막걸리

제조 : 한빛 영농조합법인

원재료 : 쌀, 이소말토올리고당, 효모, 정제 효소, 아세설팜칼륨, 조제 종국

알코올 : 6%

유통기한 : 25일

특징 : 달달하고, 탄산은 적은 편. 막걸리는 발효기간에 따라 맛이 달라지므로, 개인차는 있을 수 있음.

keyword
idle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