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따러 가야 하는데.” 이맘때쯤이면 엄마가 늘 꺼내는 말이다. 외가는 안동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다. 몇 해전 외숙모가 허리를 다쳐 외삼촌 혼자서 농사를 짓는데, 올해 일흔넷인 작은 체구의 외삼촌 혼자서 과수원 일을 한다는 것에 엄마는 늘 마음 쓰여했다. 하지만 난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한 번을 가지 않았었다.
“올해는 우리랑 가 엄마.”
“그래, 그럼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소수사원도 들릴까?”
난 엄마를 많이 닮았다. 엄마는 일흔의 나이에도 대청봉을 오르는 체력의 소유자다. 그 체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일주일에 한 번씩 등산이나 트래킹을 하는 것에 있다. 집에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으신다. 그래서 엄마의 별명이 ‘또가’다. 이번에는 또 어디를 가느냐는 의미다. 국내외 걷기 좋다는 길은 다 찾아다닌다. 국내 명산을 오르고, 올레를 완주했다. 알프스와 록키산맥까지도, 걷기 좋다고 하면 어디든 떠난다. 그래서 내가 이번에는 어디를 갈 거야 라고 지명만 얘기하면 ‘거기선 그걸 꼭 봐야 해’ 하면서 링크를 하나 던진다. 엄마의 블로그다. 엄마는 글 쓰는 것도 좋아해서 여행을 다녀온 후 블로그에 기록하는 것도 잊지 않으신다. 어느덧 700여 개의 글이 쌓여있다. 그러니 안동에서 그냥 사과만 딴다는 것은 엄마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엄마는 늘 ‘간 김에’가 있다. 엄마의 ‘간 김에’에 나도 살짝 보탠다. “엄마 영주를 가니 그럼 부석사도 가야지.” 그렇게 엄마와 사과 따는 것을 핑계로 한 일정이 정해졌다. 우리는 외삼촌이 알려준 사과 따는 날에서 가장 좋은 날씨를 골라 안동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을 지나서 과수원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작업으로 나무 사이 길목에는 사과가 가득 든 바구니가 쌓여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과의 등급을 분류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외삼촌이 환하게 웃으며 어디 지나는 길에 왔냐고 하신다. 우리는 외삼촌 보러 온 거다. 사과 따고 갈 거다라고 대답했다. 외삼촌은 먼저 인사부터 시켰다. “얼른 와서 이분들에게 인사해. 이분들 없으면 사과 농사 못해.” 사과 수확철이면 이 농장, 저 농장을 다니며 사과 수확을 도와주는 분들이었다. 농촌의 고급인력들이다.
외삼촌에게 간단히 사과 따는 방법을 배웠다. 엄지 손가락으로 사과 꼭지 있는 부분을 잡고 꼭지가 난 반대편 결로 살짝 기울이면 된다. 이렇게 쉽게 떨어지는데, 이 묵직한 사과가 지나가는 바람에 떨어지지 않고 용케 매달려있었다는 것이 대견했다.
사과를 딸 때 주의할 점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사과를 잡는 손에 힘을 주면 안 된다는 거다. 힘을 주면 사과에 멍이 들어서 꼭지 부분을 살짝 잡고 따야 한다. 둘은, 꼭지가 붙은 채로 따야 한다는 거다. 꼭지가 붙어 있어야 저장기간도 길어지고 식감도 오래 유지되기 때문에 꼭지가 떨어지면 상품으로 가치가 떨어진다고 한다.
사과를 따는 일에서 마음을 생각했다. 손에 힘을 줘서 든 멍은 얼핏 보기에 티 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멍든 부분이 물컹해지면서 진물이 나고 상처가 드러난다. 사과의 겉모습을 보고 등급을 정할 때는 미쳐 알 수 없는 멍이다. 쿨함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 상대의 무례함에 쿨하게 대처하는 이들을 보며 사람들은 멋지다고 한다. 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그들의 속 마음도 그러할까. 쿨함으로 상처를 감추는 것은 아닐까.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은 짓물러져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이라는 것은 사과 속살처럼 여린 것이니. 난 원래 솔직한 사람이니까, 내가 보기엔 불편하니까 하는 생각으로 함부로 내뱉는 말에 상대의 마음은 멍이 든다. 건전한 비판은 필요하지만 비난은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상처 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비난의 근거는 명확한가. 혹시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비난은 아닌가. 말은 마음의 멍을 만들 수 있는 위험한 도구이기에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사과를 따서 바구니에 넣을 때도 멍이 들까 조심스럽게 하나씩 놓았다. ‘톡톡’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바구니가 채워진다. 하지만 어쩌다 최상급의 큼직한 사과의 꼭지가 떨어져 나갈 때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 이게 다 돈인데.. 옷이 더러워지는 것, 신발이 흙투성이가 되는 것, 벌레들이 내 몸을 기어 다니는 것 따위에 신경 쓰이지 않았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4시간. 오늘 안에 작업이 다 끝날까 싶었던 농장에서, 나무에 매달려 있는 마지막 사과를 톡 하고 따서 바구니에 조심스레 얹었다. 과수원의 일손들은 구석에 마주 앉아 사과의 등급을 분류하고 꼭지를 정리했다. 그리고 오후 5시가 되자 작업 중인 도구를 그대로 내려두고 떠났다. 해가 저물어가는 과수원에는 남은 일거리가 있었다. 남은 일거리에 마음이 쓰인 외삼촌은 우리와 밥 한 끼 하는 것도 어려워했다. 비전문가가 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어서 도움이 되지 못한 우리는 농한기에 다시 보기를 다짐하고 숙소로 향했다.
다음날 영주로 향했다. 소수서원만 가고 싶다더니 엄마의 간 김에는 계속 추가됐다. 청량산에 올라갈까. 무섬마을은 어때. 등등. 엄마 우리가 3박 4일쯤 여행 온 게 아니야. 오늘 올라가야 하는데 산은 무리지. 가는 길에 있는 무섬마을만 엄마의 간 김에 목록에 더했다. 무섬마을은 내성천으로 둘러싸인 마을인데, 이 내성천을 건너는 외나무다리가 유명했다. 통나무를 반으로 갈라 곡선으로 이어진 외나무다리. 옛 선비들은 효율보다는 풍류를 위한 아름다움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직선으로 만들면 될 것을 굳이 모래 위에 붓으로 그림을 그린 듯 유려한 곡선으로 만든 것을 보면. 사람들은 다리 위에서 저마다 사진을 찍었고, 뒤에선 이들을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이 기다림은 서로 양해된 것이었다. 건너기 위함이 아닌 즐기기 위한 다리니까.
무섬마을을 나와 소수서원으로 향했다. 죽계계곡을 끼고 서있는 소수서원 건물은 계곡을 감상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다시 한번 옛 선비들은 공부보다는 풍류를 중요시했다고 느꼈다. 요즘 사람들은 그에 비해 너무 효율에만 집중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쉬어가는 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텐데.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인데. 문득, 그와 나는 옛 선비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석사. 왜 이제야 왔을까.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무량수전과 배흘림기둥. 국사시험 단골 출제 문제로 달달 외웠던 기억이 있다. 부석사는 봉황산 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고, 무량수전을 향하는 길은 가파르다. 힘겹게 한걸음 씩 올라 무량수전을 만나는 순간, 내가 기승전결의 끝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교과서에 실린 사진으로는 담지 못할 아름다움이었다. 보통의 대웅전보다 훨씬 크고 높으며, 처마와 기둥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백두대간의 줄기가 수묵화처럼 펼쳐졌다. 무량수전은 실내에 들어가야 배흘림기둥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튼튼해 보이는 기둥에 압도당한 기분이 든다. 조선시대에 세워진 건물과 확연히 달라서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을 좀 더 보고 싶다 생각했다. 개성에는 좀 남아 있을까. 북한과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면 볼 수 있을까.
엄마와 사과 따러 간 김에 시작한 ‘일상’에서 마음을 생각하고 풍류를 즐기다 고려시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마무리한 ‘여행’이 되었다. 일상이 여행이 되었기에 기록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