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휴가를 떠났고, 난 요리를 시작했다

by idle

“광화문에서 며칠 지내다 올까 해.” 우리는 가끔씩 서로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준다. 지난가을에는 내가 남산 자락에서, 이번에는 그가 광화문으로. 창가에 놓인 탁상달력에 그는 작은 글씨로 ‘휴가’라고 적어 넣었다. 휴가라니. 집안일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건가.


우리는 집안일을 적당히 나눠서 하지만, 요리만큼은 온전히 그의 담당이다. 떠날 날이 다가올수록 그의 걱정이 앞선다. “또 대충 생라면이나 부셔먹겠지. 카레라도 한 솥 만들어 놓고 가야 하나.”하며 너스레를 떤다. 보통은 마트에서 내가 힘들이지 않고 챙겨 먹을 수 있도록 인스턴트 국이나 덮밥 소스, 샐러드 같은 것들을 잔뜩 쟁여놨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난 건강식을 챙겨 먹기로 결심했다. 얼마 전 건강검진 결과, 공복 혈당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정상보다 살짝 높게 나온 것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매일 같이 운동을 하면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살도 빠질 줄 알았는데, 퇴사한 지 530일이 넘도록 체중계 숫자는 변화가 없다. 역시 식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음식에서 만큼은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는 그가 없을 때 한번 시작해봐야겠다.


“그릭 샐러드랑 양배추 덮밥을 만들 거야. 그리고 카흐발트도!” 못 미더운 표정으로 그가 나를 힐끗 쳐다본다. 아마도 그가 돌아왔을 때쯤 내가 의욕적으로 사들인 식재료들이 여전히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럼 그 재료로 난 돌아와서 뭘 만들지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각종 야채를 사들이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난 당근, 오이, 파프리카, 토마토, 페타 치즈, 올리브, 양배추를 카트에 담았다.

“파프리카 3개에 6,800원이라니 너무 비싸다. 토마토도.”

“야채는 원래 비싼 거야.”

“전에 가지 살 때 3개 1,000원 정도 하지 않았나?”

“얘가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야채 말고 별다른 걸 사지 않았는데, 일주일 동안 혼자 먹을 음식의 비용이 둘이 먹을 때와 비슷하다. 아니지. 페타 치즈가 많이 비싸긴 했다. 그가 떠나기 전 만찬이라며 소시지와 비싼 하와이 코나 맥주를 사서 인지도 모른다. 올리브는 그가 돌아온 이후 함께 먹을 피자를 만들 때도 쓸거니 나 혼자 먹는 거라고 볼 수는 없다.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이렇게 증명이 됐네.”

“뭐가?”

“우리 집 식비의 대부분은 네가 먹는 거야.”


그릭샐러드, 카흐발트, 양배추 덮밥


그는 휴가를 떠났고, 난 요리를 시작했다. 냉장고에 넣어둔 야채 봉지를 몽땅 들고 나와 조리대에 펼쳐 놓았다. 좁은 공간이 야채 봉지로 가득 찼고, 난 의욕적으로 야채를 다듬었다. 파프리카, 당근, 오이, 양파를 채 썰어서 스테인리스 바트에 담아 보관하고, 마지막으로 양배추 반통을 꺼냈다. 음, 양배추 반통의 양이 이렇게나 많을 줄 몰랐다. 준비한 볼 하나가 가득 넘쳐흘러서 남은 건 크린백 몇 개에 나누어 담았다.


그날 저녁으로 다듬어둔 양파와 가지, 양배추를 올리브유에 소금, 후추를 넣고 볶았다. 또띠야에 과카몰리 소스를 바르고 그 위에 볶은 야채와 닭가슴살을 올렸다. 이제 말기만 하면 된다. 아, 이런 말다가 또띠야가 찢어졌다. 그 틈 사이로 과카몰리 소스가 새어 나오고 있다. 사이즈가 좀 작은가. 유튜브로 봤을 때는 쉬워 보였는데. 다음에는 꼭 큰 사이즈를 사야겠다. 뭐 그래도 맛은 괜찮았다. 얼마 전에 새로 산 올리브유 덕이다.


다음날은 계획대로 양배추 덮밥을 만들었다. 사실, 어마어마한 양의 양배추부터 빨리 없애고 싶었기 때문이다. 밥 반공기에 두배가 넘는 양배추를 넣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 그에게 전송했다. 못 미더워하는 그에게 보내는 인증이다. ‘좋은 걸로 잘 챙겨 먹고 있네.’ 그리고 이어서 그가 사진을 보냈다. 우육면이었다. ‘우육면관이라고 숙소 옆에 있는데 미슐랭 뭐라더라’ 역시, 서울에는 맛있는 것들이 많다… 흥!


그의 휴가기간 동안 내가 만든 음식들은 모두 사진을 찍어 인증했다. 나 잘 먹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그릭 샐러드, 카흐발트(이건 만든다기 보단 담는 거긴 하다), 스프링롤.. 다듬어둔 야채로 만들 수 있는 건 다 시도해봤다. ‘맛있어 보이네.’, ‘당신 오면 내가 만들어 줄게.’ 그에게 자신 있게 답을 보냈다. 라면도 제대로 못 끓이는 나였는데, 이 정도면 많이 발전했다.


이렇게 건강식을 챙겨 먹으면, 살도 빠질 줄 알았다. 3일 연속 건강식을 챙겨 먹었으니 체중이 좀 줄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게 웬걸… 체중계 위에 올라선 나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500g이 늘었다! 어제는 요가도 하고 동네 호수도 10km 정도 걸었는데! 저녁에 스프링롤을 만들면서 야채니까 많이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 문제였을까.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코끼리도 야채만 먹는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야채도 많이 먹으면 살. 찐. 다.


keyword
idle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