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ㅌ. 알고 보니 그건 특별함이더라.

by 다운

어려서부터 상상을 자주 했다.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이 무인도가 되고, 연필은 그 무인도에 갇힌 표류자들이, 책상의 차가운 면은 바다, 필통은 연필을 구하러 온 구조선이 되는 상상을.

차가운 바다의 물살에서 겨우 빠져나온 연필은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종이와 종이 사이에 몸을 욱여넣고, 우연히 발견한 지우개 속 비상식량으로 배를 채우고, 지우개를 베개 삼아 잠에 들곤 했다. 그렇게 한 시간 같은 하루를, 두 시간 같은 이틀을 보낸 뒤 필통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구조선을 향해 열심히 온몸을 흔들어 구출되었다. 그것이 내 상상 속 연필의 삶이었다.


잠에 빠져들기 전에는 내가 좀비가 판치는 세상 속의 히어로가 되어 있었다. 폐건물 하나를 장악하고, 이 쪽으로 무리를 지어 다가오는 사고할 머리도, 세차게 뛰는 심장도, 그것을 따라 움직이는 팔과 다리도 성치 않은 덩어리들을 향해 스나이퍼를 당기고 도끼를 휘둘렀다. 소리에 약한 좀비의 특성을 이해한 후로부터 건물 내부의 작은 틈까지 모두 폐쇄하고 꼭 필요한 의사소통 외에는 입을 벙긋하지 않도록 주의시켰으며 전투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쥐어주고 휘두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버스에 올라 휴대폰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는 이런 상상을 했다. 사회가 던지는 핍박과 질타로 머릿속이 메말라버린 사람들의 시선으로 본 창밖은 흑백이 되고, 그 끔찍함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는 히어로가 있다면.


내 머릿속에는 항상 하나 둘, 새로운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접혔다를 반복했다. 나는 그것이 그저 이치에 어그러진 망상, 즉 망한 상상인 줄 알았고, 남는 건 망상의 잔해인 찝찝함과 어리둥절함, 그리고 머릿속에서 치워지지 못한 파편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망상인 줄 알았던 파편은 꿈속에서 조각조각 모여 뚜렷한 하나의 개체가 되었고, 그것은 내 손을 거쳐 하나의 문장과 문단으로 새로이 탄생했다. 나의 영감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 개체를 요리조리 만지고 다듬고 잘라내고 덧붙이며 나만이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작품으로 만들어 낼 것이다.

keyword
이전 12화ㅋ. 키읔, 자음 하나에 내 마음은 들렸다가 놓아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