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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우리네 인생은 언제나 라이브

by 다운 Mar 24. 2025

지금은 거의 눈에 띄지는 않지만, 한때는 우리의 곁에 다양한 형태로 자리 잡았던 라디오나 비디오.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땀과 노력이 섞여 하나의 결실로 만들어지고, 컴퓨터와 휴대폰 등 기계를 거쳐 업로드 된 온라인 속 영상들. 이 모든 것에는 되감기 버튼과 빨리감기 버튼, 재생과 일시정지 버튼이 주어진다.

이를테면, 라디오 안에 들어있는 카세트. 재생 버튼을 누르면 갈색 빛을 띈 얇은 비닐이 그 안에서 빙글빙글 돌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리의 기억을 뱉어낸다.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면 돌아가는 행위도 소리도 모두 멈춘다. 되감기 버튼을 누르면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비닐이 바쁘게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고, 곧 기존의 상태로 복구된다. 빨리감기 버튼을 누르면 역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는 듯 두 손을 공손히 모은다.


하지만 유무형으로 저장되지 않는 것에는 멈추는 기능도, 앞으로 되돌리거나 뒤로 감아버리는 기능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삑사리라던가, 시험이 끝나는 종이 울리기 직전 OMR 카드를 잘못 마킹한 학생의 손이라던가, 담배 연기가 자욱한 지하 어딘가의 아지트에서 수많은 도전 이후 얼마 남지 않은 전재산을 두고 마지막 한 판 승부를 거는 남자의 패기라던가, 셀 수 없이 이력서를 넣었음에도 자신을 받아 줄 회사 따위 없는 현실에 절망한 준비생의 발끝에 놓인, 높고 차갑기만 한 마지막 선택이라던가.


한 번의 저장으로 무한히 존재 가능한 것들과 달리, 우리네 인생은 무한하지 못하다. 물론 저장 또한 할 수 없다.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고뇌, 한 번의 선택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무한하지 못한 우리네 인생은 더욱 가치있다. 카세트, CD, 영상 등 데이터 따위들이 무한한 인생일지라도, 모든 것을 지울 수 있는 삭제 버튼을 눌러버린다면, 그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마냥 티끌 하나를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우리에게는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 앞으로 나아가려는 발걸음이 있다. 한 번의 실수, 고뇌, 선택을 후회하더라도 다음 단계에서 그것을 반성하고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언젠가 무한하지 못한 것이 끝났다 하더라도, 발버둥 친 티끌이, 흔적 하나가, 이름 석 자가 어딘가에 남는다.


라이브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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