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상혁 Dec 24. 2022

병인양요는 누구의 승리인가?

친애하는 사령관, 조선에서 벌어진 천주교도 및 선교사들의 학살 소식을 대하며서, 이 참혹한 능욕에 대한 처벌이 조금이라도 늦어질 경우 극동의 다른 나라들에게까지도 이러한 사례가 전파될 것이고,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5백 명의 선교사들도 끔찍하고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생각을 사령관께서도 확실히 하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망설임 없이 사령관 휘하의 해군을 요청합니다. …… 귀하가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해 최대한 빨리 조선에 대한 응징을 시작할 것을 부탁합니다.
                                                                              - 벨로네가 로즈에게 보내는 공식 서한 -


위 글은  주청 프랑스 임시대리공사 벨로네가 프랑스의 극동 함대 제독 로즈에게 보낸 공식 서한이다. 서한에는 벨로네가 병인박해를 이유로 로즈에게 조선 원정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조선의 상황을 알게 되었을까? 바로 프랑스인 선교사 리델이 조선의 상황을 알렸기 때문이다. 병인박해 당시 충청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리델은 천주교도들의 도움으로 숨어있다 조선을 탈출해 1866년 7월 7일 중국 즈프에 도착한다. 그는 곧바로 로즈에게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고 아직 조선에 남아 있는 페롱, 칼레 신부의 구출을 위해 군함 파견을 요청한다. 로즈 제독은 보복을 결정하고 해당 상황을 프랑스 해군성에 보고하면서 원정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동시에  벨로네는 페롱과 칼레의 안전을 확보하고 조선 원정에 대한 청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총리아문에 조회를 보낸다. 여기에는 프랑스가 가까운 시일 내에 조선 원정을 단행할 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청의 총리아문은 조선은 청의 속방이지만 정교가 자주이므로 중국에서 간섭할 수 없으며, 진상 조사가 우선이지 갑자기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밝힌다. 그러면서 예부를 통해 조선에 자문을 보내 프랑스가 보낸 조회문의 내용을 알리고 선후책을 강구할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조선은 회답 자문에서 병인박해의 이유를 설명하고 이후로도 천주교 박해를 지속할 것임을 분명히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조선 원정은 곧바로 단행되지는 못하였다.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민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령 코친차이나 총독의 긴급 요청으로 베트남에 군대가 동원되면서 조선 원정은 우선 순위가 뒤로 밀리게 된다. 프랑스의 조선 원정이 본격화 된 것은 리델 신부가 조선의 상황을 알린지 2개월이 지난 9월 중순이었다. 그 사이 베트남의 민란은 진압되고 로즈가 청으로 돌아온다. 귀국 직후 조선 원정을 허가하는 프랑스 해군성의 9월 8일자 훈령이 전달된다. 훈령에는 조선 원정을 허가하면서 조선 내륙의 원정까지 계획하지 않고도 안전한 정박지를 거점으로 보복에 성공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로즈는 원정 준비를 마치고 9월 18일  3척의 함대를 이끌고 즈푸에서 조선으로 출발한다.   


1. 제1차 원정의 목적은? 

  로즈의 조선 원정은 2단계로 구상되었다. 1차 원정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2차 원정을 단행한다는 계획이었다. 1차 원정대는 기함 프리모게, 포함 타르디프, 통보함 데룰레드로 구성되었다. 프리모게에는 2백 명의 군인과 대포 12문이 있었고, 전체 인원은 3백여 명 규모였다. 이들은 아산만에서 덕적도를 거쳐 인천 물치도에 도착한다. 원정대는 21일 서울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하였고, 기함 프리모게호를 물치도에 남겨둔 채 2척의 배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다.  26일에는 양화진을 지나 서강에 도착해 하루 동안 정박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포 군수와 양천 현령의 문정만 있었을 뿐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이들은 한강의 수량과 수심 및 강변의 방어 상황 등을 조사한 후 다시 물치도로 돌아간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로즈는 10월 1일 세척의 함대를 이끌고 물치도를 떠나 즈푸로 되돌아온다.     

  10월 6일 로즈는 정찰을 위한 1차 원정의 목적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군성에 알리면서, 약 1,900여 명의 육전대와 곡사와 시조포 등 2개 포병 중대면 서울을 점령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조선이 보여준 소극적인 방어 태도 및 리델 신부와 조선의 천주교도들이 알려준 정보가 판단의 근거였다.


2. 제2차 원정 당시의 상황은? 

  10월 3일 즈푸에 도착한 로즈 제독은 곧바로 2차 원정을 준비한다. 그는 강화도를 점령해 한강 하류를 봉쇄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중국 주둔 함대 뿐 아니라 일본에 주둔해 있던 함선과 해병대까지 소집하여 원정대를 꾸렸다. 요코하마에 있더 프랑스의 정예 병력인 해병대 280여 명도 이때 동원된다. 원정대는 총 7척의 함대와 1,000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2차 원정대는 10월 11일 즈푸를 출발하여 이틀 뒤 물치도에 정박한다. 좁은 강화 해협의 특성으로 배수량이 큰 3척의 군함은 물치도에 대기했다. 14일 아침 군함 2척과 병력을 실은 종선들이 강화도 갑곶진으로 상륙했다. 15일에 갑곶진 주변과 강화읍 정찰하였고 16일 아침에는 강화 읍내로 진군해 강화부성을 점령했다. 이때까지 조선군의 별다른 저항은 없었고 프랑스군의 인명 피해도 전무했다. 점령 직후 로즈는 조선 국민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내걸었고, 이튿날 베이징에서는 벨로네가 청과 열국 공사들에게 한강 봉쇄 사실을 알렸다. 강화부성을 점령한 프랑스 군은 각 관아 및 장녕전을 점령하고 막대한 군기(軍器)와 식량, 재물,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점령 4일 뒤 로즈 사령관이 해군상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약탈 과정에서 조선의 역사ㆍ과학ㆍ예술을 다룬 주요 서책 3백 책과 당시 가격으로 20만 프랑에 해당하는 은괴를 노획했다고 한다.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한 채 서울로 진격하지 않자, 이 틈을 이용해 대원군은 급히 방어 대책을 마련했다. 1차 원정부터 강화부성 점령까지 사실상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던 조선 정부가 처음으로 대응책을 마련한 것이다. 먼저 순무영을 설치하고 훈련대장 이경하를 순무사로 어영중군 이용희를 순무중군으로 임명한다. 순무영 설치 사흘 후 이경하는 로즈에게 서한을 보내 침략 행위를 비난한다. 로즈는 답신을 보내 병인박해의 책임자를 처벌하고 전권 대신을 보내 프랑스와 조약 체결을 요구한다.     

  그 사이 순무 중군 이용희는 2,021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동해 통진부에 진을 치고 프랑스군과 대치한다. 그는 굳이 강을 건너 강화부로 들어가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로즈는 통진에 조선 정부가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문수산성으로 정찰대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70여명으로 구성된 정찰대는 조선군의 기습으로 3명의 사망자와 2명의 부상자만 남긴 채 격퇴되었다. 이후 양헌수가 강을 건너 강화도에 들어가 정족산성에서 매복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사실은 강화도의 천주교인에 의해 로즈에게 전달되었고, 로즈는 11월 9일 150명의 정찰대를 정족산성으로 파견한다. 10일 새벽 정족산성 동문으로 진입하던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매복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는다. 장교 5명을 포함해 32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이다. 이때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 1명과 부상 3명이었다. 이 승리는 황해도와 평안도 등지에서 급히 모집했던 포수들(엽군)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 조약 체결을 위한 전권 대신을 파견하지도 않고 정족산성 전투마저 패배하자 로즈는 조선 정부를 굴복 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는 조선군의 병력은 그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조선으로 복귀했던 리델 신부와 다른 프랑스 신부들이 조선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로즈는 철수를 결심한다. 원정의 목적 일부가 성공했다는 명분이 생긴 것이다. 그는 외규장각 서적(345권)을 비롯해 강화부성에서 약탈한 물품을 챙기고 장녕전과 다른 관아에 불을 지른 후, 11월 21일 함대를 철수하여 즈푸로 되돌아갔다. 


3. 누구의 승리인가? 

 병인양요가 끝나고 프랑스와 조선은 모두 자국의 승리를 선전했다. 로즈는 프랑스인 선교사 살해에 대한 응징은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하였고, 프랑스 정부는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래서 원정 직후 권한 정지 명령을 받았던 로즈는 오히려 인도차이나 총독 서리, 지중해 함대 사령관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간의 평가는 그렇지 않았다. 조선과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지도 못했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프랑스군이 정족산성 패배 이후 철수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성공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은 어떠했을까. 조선 정부는 정족산성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알리며 프랑스를 격퇴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병인양요는 조선이 승리한 전쟁인걸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랑스가 강화부를 점령하고 약탈할때까지 조선 정부는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프랑스 침략에 대한 청의 경고도 사전에 있었다. 강화부가 점령당하자 부랴부랴 순무영을 설치하고 병력을 소집했을 정도였다. 더욱이 문수산성과 정족산성 전투에서 승리의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은 관군도 아니었다. 그 주역은 경기, 함경, 평안도 등지에서 급히 모집한 포수들이었다.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의 침략이 예고된 상황에서조차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고, 외교적 해결 방법에 대해서는 고려 하지 않은 채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일관한 조선 정부가 과연 승리했다고 할 수 있을까     

  또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를 거치며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원래부터 서양 세력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프랑스를 끌어들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했을 만큼 집권 초에는 국익의 관점에서 서양 세력에 합리적으로 접근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천주교와의 접촉으로 정치적 위기에 빠진 대원군은 병인박해를 통해 이를 극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병인박해 이후에도 천주교 및 서양 세력에 대한 대원군의 강경한 입장은 변화되지 않았다. 이미 안동 김씨 가문이 일부 복귀하는 등 정치 질서의 재편도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병인양요를 거치며 대원군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제 대원군의 조선에게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이외의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스스로 좁혀 놓은 외교 선택지는 조선에게 긍정적이었을까.  일방적인 외교 방침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지금은 상식일 것이다. 그렇기에 대원군의 권력을 공고히하고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시켰던 병인양요를 나는 승리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 참고 문헌

「병인양요의 재조명」, 이주천, 김진환,  2007 

 「丙寅洋擾와 興宣大院君 政權의 對應」, 연갑수, 1996 

 『근대 조선과 세계』,  최덕수, 2021       『흥선대원군 평전』, 김종학, 2021


매거진의 이전글 러시아가 병인박해를 유발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