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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츠 Daltz Jan 24. 2024

어린이 공연을 하며, 다시 쓰는 어린 시절.

왕따 피해자였던지, 혹은 사회 부적응자였던지.

 별 성과가 없는 음악 활동을 10년 가까이하며 전문성이 없는 다른 일들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동안, 그런 삶이 힘들지 않느냐는 이야기 나는 꽤 들었다. 은 내가 힘들 것이라고 이미 가정한 사람들로부터 지나친 배려를 받기도 했다. 정작 음악 활동을 시작한 후로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게 잘만 지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와중에 장 큰 스트레스를 굳이 찾아내보자면 렇게 가끔은 한심한,  가끔은 연민 어린 시선받게 된다는 였다. 하지만 생활 반경의 폭이 매우 좁은 내가 그런 시선을 보낼만한 사람을 만나는 건 어차피 그리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스트레스의 크기도 충분히 일상적인 감정으로  수 있을 법하였다.


  시절보다는, 오히려  살 때가 나는 훨씬 더 힘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을 갔던 사립학교 반이 여섯 개밖에 없었다. 전교생 수가 적은 만큼 다른 아이들은 지난 2년 동안 서로 안면 정도는 다 튼 상태였다. 게다가 사립학교의 특성상 자녀에게 유난한 관심을 쏟는 부모님들이 많았다. 그런 집안들은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이미 부모님과 아이들이 같이 모이는 그룹 형성여 서로 어울려왔다. 미리 친구를 만드는 것은 물론 사교성까지 길러온 것이다. 척도 아닌데 가족구성원 모두가 함 어울리다니. 나로서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방식의 교류였다. 시골에서 상경하여 도시의 사교계를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낯선 교실 구석에 조용히 자리하였다.


 그러나 결이 다르다는 건 한눈에 들킬 수밖에 없었다. 옷차림부터 그랬다. 평일에는 교복을 입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토요일마다는 사복을 입어야 했다. 초등학생인데도, 5학년쯤 되니 아이들은 당시 유행했던 '쎄씨'나 '신디 더 퍼키' 같은 션잡지에 나온 유명 브랜드의 들을 입고 왔다. 패션에 대해 전혀 눈뜨지 못한 상태였던 나는 엄마가 사둔 노란 티셔츠에 빨간 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다 영문도 모르는 채로 놀림을 받았다.


 아주 가끔 단체로 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가는 데 끼게 되면 세 개의 방 중에서 두 개를 아이 혼자 쓰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침실 겸 공부방, 그리고 놀이방. 놀이방 따로 있다는 것부터가 생경했는데 그 안에 들어가 보면 더 놀라웠다. 실제로 불이 들어오거나 물이 나오는 주방놀이 세트. 난감 동전을 넣으면 사탕이 나오는 자판기. 버튼을 누르면 조명이 켜지거나 무대가 돌아가거나 하는 작고 예쁜 인형의 집. 나는 어디에서 본 적 없 신기한 수입 장난감들이다. 그리고 밥을 먹을 때주 비싸 보이는 그릇에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요리들이 나왔다.  


 역시 가난했던 적이 한 번도 없는 집에서 별다른 아쉬움을 느끼지 않고 자랐다. 내가 놀러 갔던 집들과 소득 수준 면에 큰 차이 없는 집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사립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가정들 대체로 우리 집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라리 근처의 공립학교에 다녔다면 나와 비슷한 가정에서 자란 친구들이 많았을 텐데. 모든 지점에서 미묘하게 겉돌다 보니 다수의 아이들은 거리감을 느끼고 나를 멀리했다. 그리고 그렇게 친구가 별로 없는 아이를 괴롭히는 무리 매년 꼭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워낙 강렬 탓인지 어린 시절은 내게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괴로운 이미지로만 남다. 소소하게는 좋았던 일들도 분명 있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다. 시의 나는  아주 잔잔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느 날엔가는 샤워를 하다가 충동적으로 화장실 수건걸이에 샤워타로 목을 매어본 적도 있었다. 소한 괴롭힘이어지는 나날들이지만 딱히 그날  특별한 사건어났아니었다. 그저 샤워타과 수건걸이의 모양새가 새롭게 인식되었고, 저렇게 적당한 게 있는 걸 이제까지 왜 몰랐지 하고 깨달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발이 닿는 높이였기 때문에 무서우면 바로 그만둘 수 있겠다는 판단이 오히려 실행을 부추겼다. 그러나 목에 닿아있는 까슬까슬한 샤워타올의 감촉에 잠시간 무게가 실렸을 때도 나는 바닥에 발을 딛지 않았다.  내 무게를 견디지 못한 수건걸이가 뽑. 나는 얼른 화장실 밖으로 나가서 가족들에게 말했다. 걸려있는 수건을 너무 힘차게 당겼더니 수건걸이가 망가졌다고.


 가족들은 역시 내가 힘이 세다며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정말로 힘이 세서 수건걸이를 뽑은 아이가 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기분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 당시의 나에겐 아주 일상적이고 소소한 정일 뿐이었다. 간절하게 죽고 싶어서 열심히 계획을 세워 실행한 거였다면 모를까, 지극히 가벼운 마음으로 벌인 이었다. 죽지 않았으니 다시 살아가면  거였다.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내고 나니 어른이 되어서 만나는 어린이들 그다지 반길 수가 없었다. 속을 모르겠는 느낌이었다. 겉모습은 어쩔 수 없이 귀여웠지만, 과연 실제로도 그렇게 귀여운 삶을 살고 있을까. 부로 여워하는 게 오히려 기만이 되지는 않을까. 어린 시절의 나,  속도 모르고 귀여운 역할이나 맡기려는 어른들 마주 때마다 더 쓸쓸한 마음이 들곤 했는데.


 어떤 아이는 당시의 나처럼 습관적으로 일상을 살아내 당장 죽는다면 꽤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렇다면 그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게끔 괴롭히 있는 쪽의 아이 재할 거였다. 좀 더 흔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머릿수가 짝수인 그룹을 만들기 위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는 아이들을 거였다. 나는 진심이 아닌 관계는 서로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차라리 혼자인 걸 견뎌냈었는데 말이다. 은 맥락에서, 눈앞의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도 모르면서 아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예뻐해 버실례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아이 뻐한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공연을 하면서는 나도 대체로 무척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관객이 아이들일 때면 더 특별한 교감을 나눌 수도 있다. 무대 위의 이야기가 진짜인 양 몰입해 주는 건 아이들만의 특성이다.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이야기들도 그 믿음을 통해서는 실제가 되는 것만 같다. 그 속에서 반복하여 즐거움을 느끼던 나의 뇌는, 매번 다른 아이들과 함께하는 거란 사실은 인식하지 못했는지 '아이들'이라는 공통점에 멋대로 친밀감을 쌓아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예뻐하게 되어버린 내가, 나는 참 조심스럽다. 가 어릴 때는 학교에서 공연관람을 시켜주 않았다. 하지만 현장학습을 간다던가 특별수업을 한다던가 하는 낯선 이벤트가 벌어지면 나는 분명 더욱 스트레스를 받곤 했었다. 학교에서 공연을 보는 날, 대다수의 아이들이 끼리끼리 이동하여 평소 보다 더 신이 나서 웃고 떠들며 즐기는 동안에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자신의 쓸쓸함을 더욱 체감하게 될지도 모르는 거다. 내가 종종 그랬던 것처럼.


 공연 시작 직전에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던 어떤 아이 "분명 재미없을 거야!"라고 말던 적이 있다. 그러자 다른 아이가 얼른 "쟨 원래 이상해요"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무언가 잘못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쟨 원래 이상해"라는 말을, 나도 초등학생 때 종종 듣곤 했었다. 운동장에서 넘어지거나 과학 실험 중 순서를 틀리거나 하는 사소한 실수에도 그런 평가가 따라붙었다. 또 공연날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친구처럼, 모두가 즐거워하는 분위기를 혼자서만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걸 들켰을 때도 그랬다.


 공연이 시작되자 원래 이상하다는 소릴 들었던 그 아이는, 악기에서 신기한 소리가 나면 어쩔 수 없이 무대바라보았 모두가 웃는 장면에서는 같이 웃어버리기도 했다. 지만 스스로가 웃고 있었던 것을 의식하면 얼른 다시 표정을 굳혀버렸다. 나는  장면이 슬픈 동시에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아이들이라면 그 개성을 모른 채로도 애정이 가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어린아이가 세상을 향해 벽을 쌓아도, 그건 아직 견고하지 못하다. 그래서 삐죽 튀어나오는 솔직함이 그들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렇게 아이가 사랑스럽다고 느 후에는, 아직 고하지 못한 벽이 아이 스스로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모양새로 자리 잡아가길 바라게 되었다. 솔직한 감정을 세상과 나누는 바람직한 방식 양하게 경험해 보면서 말이다. 아주 사소하게는 늘 공연을 보며 웃었던 것처럼. 그러고 보면 내가 괴롭게만 기억하는 초등학생 시절에도 어쩔 수 없이 웃었 들이 꽤나 있었지 싶다. 그렇게 웃음을 배워두었으니 환경이 바뀌었을 때 어설프게나마 새로운 관계들 속에서 웃음을 이어갈 수 있었을 거다.




 초등학생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학교에 운석이 떨어지는데, 나만 그걸 우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초능력이 있는 거다. 그러면 나는 다른 재학생들을 구하고, 그 공을 인정받아 더는 무시받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면서 남은 학교생활을 하는 거다. 그 와중에 사고인 척하며 나를 괴롭히던 몇몇 아이들은 려 죽게 둘까 싶어 속으로 그 명단을 작성해보기도 했다. 또 어떻게 그 아이들을 가장 높은 층에 한꺼번에 모아야할지를 고민해보기도 했다.

 

 성인이 된 후 그 시절을 돌아보면서는, 런 생각을 하는 음침함이 은연중에 새어나가 그걸 감지한 몇몇 아이들이 나를 더 싫어했던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 재난상황에서 사람을 구하는 데 차별을 둔다는 점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일종의 사회부적응자 게 아닌지, 그런 티가 나버려서 배척당한 건 아니었을지를 곱씹어보기도 했다


 러니까 어린이 공연을 활발하게 하기 전인 30대 초반까지 더라 나는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당시에 나를 괴롭혔던 아이들이제는 그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른이 되어있을 거였다. 하지만 그 어른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고 내 옆엔 구명조끼가 있다면, 나는 여전히 그걸 던져주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3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명조끼를 던져줄 수 있을 것 같다. 디어 그들을 나와는 더 이상 관계가 없어진 낯선 존재들로 여길 수 있을 것 같다. 초등학교에서의 나는 이제, 괴롭힘을 당했던 람이 아니라 매 즐거움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있다. 예전의 내가 맺었던 관계들은 이제 모두 전생의 것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초등학교를 떠올려보면 예전에는 차가운 돌 벽과 날카롭게 은색으로 빛나는 계단 손잡이가 떠오르곤 했다. 창밖의 햇살은 따스해 보이는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건물 안쪽의 응달 서늘하다. 매일 아침 그 길목을 지나 반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찌나 무거웠는지. 그러나 이제 초등학교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그려진다. 기대감에 반짝이는 눈동자, 활짝 핀 표정들, 까르르 울려퍼지는 맑은 웃음소리르르 몰려드는 레는 박수 소리.


 초등학교가 괴로운 이미지로 남아버린 건 평생 어쩔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교사가 될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을 것도 아니니, 초등학교와 더 이상은 연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방식으로 나는 지난 일 년 중 백일 정도를 초등학교에서 보내게 되었다. 리고 어린 시절 겪어보지 못했던 초등학교에서의 즐거움을 이제 와서 수십 배로 돌려받. 그래서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 공연에 더욱 공을 들다. 한 번 한 번이 마치 과거를 고이 떠나보내는 의식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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