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공연 역시 동화 공연과 마찬가지로, 나의 덕업일치로부터 시작된 공연이었다. 나는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긴 했지만 굉장히 라이트 한 리스너였다.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유명한 곡들, 또는처음 듣더라도 누구나 흥을 낼 수 있을 법한 신나고 대중적인 곡들을 좋아했다. 또 웅장한오케스트라보다는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성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규모가 크지 않은 연주를 좋아했다. 대중음악에서 쓰이는 악기들과 함께 편곡된 클래식 음악들은 특히 흥미로웠다.
그런 취향을 반영한 유튜브 재생목록을 들으며 산책을 즐기던 어느 날.내가 좋아하는 소규모 구성으로 라면 우리 밴드 안에서도 충분히 재미있는 클래식 공연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사촌 자매들이 각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전공한 후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프로 연주자였다. 연락을 해보았더니 흔쾌히 응해주어 뜻을 모아 클래식 공연 프로그램을 꾸리게 되었다.
동화 공연이 많은 섭외를 받게 되면서 낯설었던 어린이들이 친근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질 무렵. 그렇게 막 시작한 클래식 공연을 통해 나는 또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다. 클래식 공연이 점점 알려지면서는 성인 분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도서관에서 진행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럴 때면 5,60대 분들께서 객석의 과반수이상을 채워주셨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도 대하기 어려워했다.
객석에 다른 연령대가 거의 없이 5,60대 어른들만 계시는 것을 보면, 무대에 오르는 순간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큰 긴장감을 느끼곤 했다. 특히 숨죽여 몰입한 채로 음악을 감상해 주시다가 곡이 끝나면 정제된 박수만을 보내주시는 몰입도 높고 교양 있는 관객 분들이 가장 어렵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다른 출연진들은, 오늘은 격식 있는 연주회 분위기가 만들어져 집중해서 연주하기에 참 좋았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어색함을 느낀 것은 나뿐이었다. 극도로 내향적인 유년기를 보냈던 때문인지, 내가 그나마 편하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으면서 성별까지 같은 사람들뿐인 모양이었다.
그동안 공연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관계자 선생님들과 통화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꽤 즐겁고 편안했기 때문에, 나는 부족했던 나의 사회성이 충분히 성장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실은 공기관에서 공연 섭외를 맡고 계신 선생님들께서 거의 다 내 또래의 여자분들이셨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문학과 음악, 또 공연이 포함된 환경을 선호하여 그 속에서 직업까지 가진 사람들로부터는 특유의 감수성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공감에서 비롯된 편안함을 넘어서 반가움까지도 느낄 수가 있었다. 또 일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거나 명확한 주제를 가지고 하는 이야기라면 원래도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부족했던 사회성이 성장한 것이 아니라, 원래 평균 이상이었던 설명 능력이 잘 활용되고 있는 부분이었다.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의 나는 여전히 사회성이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어떤 화제를 꺼내야, 또 어떤 대답을 해야 자연스러울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그자체가 이미 부자연스러웠다. 개인적인 자리에서, 특히 남자어른을 대하자면, 여전히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신나게 공연을 마치고 나서도 남자 어른인 교육감님이나 교장 선생님, 때로는 작가님과의 식사 자리가 마련된다면 나는 대화도 거의 못하는 데다가 잔뜩 긴장을 한 모습으로 분위기를 망쳐버리곤 했다. 분위기 주도를 아주 잘해주시는 여자 어른 앞에서라면 겨우 두세 마디까지는 입이 떨어졌으나 그것도 일반적인 사회인의 모습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무대 위에서는 그렇게 신나게 웃고 떠들었으니 사석에서의 소심한 모습은 더 이상해보일지도 몰랐다. 혹시나 상대를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인다거나 예의가 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도 걱정이 되었다. 어색함에다가 그런 걱정까지 더해놓으니 나는 우중충한 기운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 상태에서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거나 지나친 정적이 이어질 때마다는 혼란스러움이 나를 흔들고 지나갔다. 그러면 내 안에 가득 차올라서 찰랑거리고 있던 우중충한 기운이 사방으로 튀어버렸다. 지극히 일상적이었던 풍경은, 그 위에 이상한 얼룩이 묻은 기억으로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남을 거였다.
대화 중 상대의 이야기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매번 그 자리가 끝나버린 후에야 떠올랐다. 집에 돌아온 나는 지나가버린 상황을 복기하며 이제야 떠오른 대답들을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는 효과도 있었고,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를 위해 말하기 연습을 하는 거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연습한 말을 쓸 기회가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앞으로 완전히 똑같은 상황이 와서 그 말을 활용한다 한들, 이렇게 연습을 해본 말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는 자연스러워질 수가 없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뱉는다면 나는 아마도 ‘발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보일 것이다. 온전한 소리도 되지 못한 채 입모양으로만 뻐끔뻐끔 뱉어낸 호흡들은, 축축한 밤공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까 어쩌면 무대 위에서 다수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은,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쉽게 부담을 느끼는 내가 이 세상과 안정적이고 즐겁게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이어가는 거라면 얼마든지 즐겁게 잘할 수 있으니까. 또 무대 위에서 전달력을 높이고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쓰는 특유의 목소리 톤을 적용하고 나면, 공들여 짠 대본을 수십 번 연습하여 이야기한다 해도 부자연스러울 게 없다. 나에게는 정말 맞춤형 표현의 장인 셈이다.
똑같은 공연을 몇 백번씩 해도 나는 그다지 지루해지지가 않는다. 같은 공연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익숙하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이 공연 중의 즐거움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5,60대 성인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이라도, 여러 번을 거듭하면서는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오히려 공연을 통해 어른에게 어색함을 느끼는 나의 성향을 개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생각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침 새로운 클래식 공연 프로그램을 올리게 되었다. 관객의 대다수가 집중도가 무척 훌륭한 성인 분들이셨다. 첫 공연인 데다가 성인 분들 대상이라니,나는 2023년에 했던 모든 공연 중 가장 긴장한 채로 진행을 했다. 노래를 하는 순간들에는 관객 분들의 몰입 덕분에 나도 평소보다 훨씬 더 분위기에 빠져서 공연을 할 수가 있었는데, 정적 속에서 해설자 역할을 맡아 홀로 말을 해야 하는 순간들에는 갑자기 어색해졌다. 몇몇 순간에는 말을 살짝 더듬기도 하였으므로 아무래도 어색해하는 티가 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게 공연을 마치고 나니 아쉬움이 컸다. 다음 공연 때는 꼭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특히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의 영상을 잘라서 친구에게 보내 조언을 구했다. 친구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호흡에 좀 더 여유를 주면 좋을 거라는 등 당장 쉽게 적용해 볼 수 있을 몇 가지 팁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 영상 속에서 보이는 공연 모습도 프로로서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쉽게 눈치챌 수도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영상을 다시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한층 진정된 마음으로, 다음 공연을 위한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보름 정도 지나서 같은 프로그램을 두 번째로 공연하게 되었다. 나는 그 친구가 객석에 있다고 생각하며 공연을 했다. 그러다 보니, 네가 말해줬던 것들을 바로 아주 잘 적용했지? 하고 장난스럽게 과시를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분명 예전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집중만 해주셨던 관객 분들이었는데, 어느새 마치 친구처럼 친근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에 호응을 해주고 계셨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다가와서 인사를 해주시거나 몇 가지 질문을 건네주시는 관객 분들도 계셨다. 나도 자연스럽게, 즐거운 마음으로 응하여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성인 대상의 공연을 할 때마다 나는 계속해서 객석에다가 가상의 친구를 앉혀놓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친구를 떠올리는 것도 잊어버렸다. 나는 어른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꽤나 친근한 뉘앙스를 유지하며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는 관객 분들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어른들에 대하여 인지할 때도, 나이나 성별보다는 그 사람 고유의 개성을 더 바라보는 쪽으로 변화해 가는 스스로를 느꼈다. 그러고 나니 공연을 하며 어른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어색함을 어느 정도 극복한 것이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적용이 될지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는 생각보다 금방 왔다.초등학교에서 공연을 종종 같이하곤 하는 한 작가님께서 어느 날 공연 후에 밥을 사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거의생애 최초로 남자 어른과의 식사 자리가 꽤나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고무적인 일이었다. 작가님께서는 최근 ‘강연자를 위한 강연’이라는 책을 내셨다면서 그 내용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덕분에 주제가 확실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나도 편안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게다가 비슷한 무대에 서고 있는 인생 후배로서 요긴하게 들을 수 있는 조언들이 많았다. 나는 어색함을 떠올릴 새도 없이 몰입하였다.
한편, 어쩐지 같은 사회인으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여 이 날 식사 자리가 끝난 후에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맞다, 나도 어른이구나! 어른은 대하기가 어렵다고 느꼈지만,사실은 그런 나도 이제 충분히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였다. 어른을 동년배와 너무 극단적으로 구분지어서 어려워할 필요까지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지금의 내가 어른을어려워하는 것처럼 나를 어려워하는 사람도 생길지 모른다. 그때 상대가 편안하도록 대화를 이끌어 갈 줄 아는 멋진 어른이 되려면, 나도 지금부터 멋진 어른들을 많이 경험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멋진 어른들을 그다지 많이 만나보지 못했었다. 그건 나의 환경이나 운이 별로 좋지 못한 탓인가 싶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에게 멋진 어른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니, 그게 아니다. 상대방의 개성이 아닌 나이만을 먼저 보고선 지레 벽을 느껴버리는 청년에게 멋진 어른 역할을 해주는 건, 그 누구라도 아주 많이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나아졌다지만 아직도 나는 어른을 대할 때 평균 이상의 어색함과 긴장감을 느끼는 타입일 거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나이나 성별 따위를 먼저 인식하고 불편해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과 같이 긍정적인 경험을 거듭해 나가면서는,언젠간 개개인의 개성을 더 먼저 보고 그에 맞게 교류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모른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가까운 시일 내에 그렇게 될 수도 있으리라는 예감이 든다.지금처럼 열심히 공연을 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말이다. 불편했던 어른들에게, 다정한 클래식 음악을 건네며.
가장 최근에 성인 분들을 대상으로 도서관에서 진행하였던 클래식 공연. 전혀 긴장되지 않았고, 무척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