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광복절의 이틀 전이었다.
요즘 나는 회사에서 멤버들에게 각자의 탁월한 점을 묻고 있었다. 나쁘지 않게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탁월한 점. 너무 탁월해서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을 하려면 수고가 들어가지만 나는 숨 쉬듯이 할 수 있는 그런 일. 그 탁월한 점을 기반으로 업무를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야 하면서도 기쁘고 탁월하기에 성과가 나고 그렇기에 팀에 기여가 되고 동시에 멤버들로부터 존중도 받을 수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무엇이 그토록 탁월한지를 다시 내게 묻기 시작했다. 최근 4-5년은 늘 물어왔던 질문이기에 신선하지는 않았지만 늘 그것에 속 시원하게 답하지 못했기에 다시 묻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떤 질문에도 가감 없이 솔직한 생각을 말해주는 ㅊㄱ에게 전화를 했다.
"너가 봤을 때 나는 어떤 점이 탁월하다고 생각하냐? 적당히 잘하는 거 말고 대한민국에 줄을 세워도 이거 하나만은 저~~~~~ 앞줄에 설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거 말이야"
"형은 프리젠테이션하는 거"
생각을 하고 말하는 건지 싶을 정도로 ㅊㄱ는 묻자마자 대답을 했다. 어떤 프리젠테이션을 말하는 거지 싶어 눈알을 위쪽으로 굴리며 생각을 이어가려던 차에
"말하는 거. 이야기하는 거."
라고 핸드폰 너머로 이걸 왜 모르느냐는 목소리가 건너왔다. 그 순간 몇 년 동안 수 없이 물어왔던 내가 나의 탁월한 점을 물을 때마다 답이 되었던 느슨한 것들이 순간적으로 연결되어 버렸다. 맞네. 이야기하는 거였네. 허탈할 정도로 잘 알고 있기는 했으나 이것이 나의 탁월한 점일 거라고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 탁월한 점이 세상을 살며 주로 타인을 통해 짐작해 보았듯, 노래를 부르는 일이거나 춤을 추는 일이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이거나 글을 쓰는 일이거나, 그러한 것이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해 온 것 같았다. 하지만 느슨했다가 연결된 그것들을 다시금 생각해 보니 내 인생의 전반을 걸쳐 나는 늘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 때 친구 ㅇㅎ는 나를 그렇게 떠올렸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도 얘가 하면 너무 재밌었다며. 지나고 보니 그 이야기에는 과장도 허풍도 많았지만 너무너무 재미있었다고.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던 고등학교 시절이 연결됐다.
그러고 보니 타고난 면도 있겠다 싶었다. 엄마는 정말 재밌는 분이셨다. 엄마의 모든 대화에는 농담이 빠지는 일이 없었고 늘 장난을 칠 수 있는 기회만을 엿보는 모습을 나는 어려서부터 보며 컸다. 그런 엄마의 유전자가 나의 피에도 흐르고 있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 탁월한 이야기꾼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시절, 그런 엄마를 재밌게 하는 일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자 삶의 목적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엄마와 둘이 남아 한 두시간을 이야기했다. 오늘 학교에서, 또 학원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엄마가 옅은 미소만을 지으시는 날은 나에겐 실패였다. 엄마가 박장대소를 하시는 날에야 발을 뻗고 잠에 들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서 마지막에 엄마가 무장해제가 될 수 있는지를 여러 각도에서 구성해 보고 이야기했다. 매일매일 엄마와 둘이 마주 앉은 저녁식사 후 테이블은 나에겐 작은 무대이자 훈련장이었다. 마치 손웅정이 손흥민을 훈련시키듯 나는 그렇게 자발적인 훈련을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가졌던 그 때가 연결됐다.
생각해 보니 미팩토리를 대표로서 운영할 때도 그랬다. 나에게 가장 기쁜 시간은 한 달에 한번 전 직원을 모아 회사의 방향을 공유하는 타운홀 시간이었다. 각자 흩어져 업무를 하는 멤버들에게 전사의 방향을 공유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주는 일도 물론 중요했지만, 얼마나 재미있게 그 이야기들을 전달할 수 있을지가 내게는 더 큰 관심사였다. 타운홀 자료는 늘 내가 직접 준비했었는데, 프리젠테이션 장표에 어떤 짤을 넣을지, 그 짤은 어떤 타이밍 때 나오면 멤버들이 더 웃을지를 고르고 고르다 나는 늘 타운홀 전날 밤은 2-3시는 되어야 잠에 들었다. 짧은 수면시간에 피곤해도 타운홀에서 내가 원하는 포인트에서 멤버들이 웃기도 하고 우리 비전과 방향에 감화되어 눈빛이 맑아지는 것을 목격하면 모든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던 그날이 연결됐다.
내가 나에 대해 모르고 전혀 궁금해하지도 않고 살아가던 시절, 당시에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내가 나를 탐구할 수 있는 시작을 만들어 준 친구 ㅈㅇ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내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그 이야기의 진실여부를 떠나서 설득이 되고 믿어지더라는. 그런 내가 그 능력을 나쁜 방향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향에서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아마 나쁘게 활용되었다면 새로운 사이비 종교 지도자가 탄생할 수 있을 정도로, 두려운 수준의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 그 말도 갑자기 연결됐다.
그러게. 함평의 기본학교의 마지막 수업 때도 그랬다. 6개월의 기본학교 커리큘럼의 마지막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각자 발표해야 했다. 나는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이야기했다. 발표의 끝이 아닌 중간에 나온 한 장표와 나의 이야기에 교수님은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먼저 큰 박수를 쳐주시기도 했다. 늘 교수님께 감동했던 내가 처음으로 교수님을 감동시킨 그 때 그 장면은 아직도 사진처럼 찍혀 잊혀지지 않는다. 발표가 끝나고 최진석 교수님은 내게 이런 프리젠테이션을 자주 하는지 물으셨고 나는 종종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잘한다. 정말 잘한다. 라고 극찬해 주셨던 그날도 갑자기 떠올라 연결됐다.
https://www.youtube.com/watch?v=JTWITwdIUbw&t=361s
그러고 보니 무턱대고 여준영 대표님을 찾아가서 회사를 인수해 달라고 했던 그날도 이 탁월한 점 때문이었겠구나 싶었다. 장르를 만들고 싶다고.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내가 그 모험을 할 수 있도록 나의 연대가 되어달라고. 나의 가문이 되어달라고 이야기했던 그날도 유감없이 나의 탁월한 점을 발휘했던 거구나. 단 한 번, 단 한 시간의 티타임으로 회사를 매각할 수 있었던 프레인빌라 1층 카페에서 여준영 대표님을 만난 그날도 그렇게 연결됐다.
맞다. 프레인에 인수되고 첫 연말에 가졌던 융합의 밤에도 그랬다. 내가 주체적으로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최진석 교수님과 회사를 인수해 준 여준영 대표님 외 나의 모험을 지지하고, 또 지지해 주시기를 내가 바라는 분들을 모시고 가졌던 작년 12월에 가진 행사에서 나는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왜 내가 이 모험을 시작했는지, 어떻게 살다가고 싶은지에 대해서. 발표를 마치고 앉으니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프레인TPC 소속의 오정세 배우님이 나에게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기분'이었다는 감상평을 남겨주셨었다. 배우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의 표현이 아닐까 싶어 기뻤던 그 밤도 연결됐다.
연결된 모든 날들을 떠올려보니 나에게 있어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을 웃게하고 감동시키고 설득하는 일은 수고롭지 않고 숨 쉬듯 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탁월했다. 나는 알게 모르게 그 탁월함을 잘 쓰고 있었다. 이야기를 구성하고 이야기를 하는 일. 어찌 보면 브랜드를 만들고 마케팅을 하고 소비자를 설득하는 일도 나에게는 이야기를 구성하고 이야기를 하는 일처럼 느껴져서 수고스럽지 않았고 자연스러웠구나.
이 모든 점들이 연결되는 순간, 마치 고속도로가 뻥 뚫리듯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가 내 눈앞에 드러났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야기꾼으로 살고 싶다는 나의 욕망이 드러났다. 30년을 넘게 살면서 '내'가 없었던 나의 이야기, 그렇게 나를 알기 위해 '나를 궁금해하며 쳤던 발버둥'과 '나의 욕망'에 대한 나의 이야기, '자기 자신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일을 하면 어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를 평생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30년 정도 후에는 춤꾼, 소리꾼과 같이 이야기꾼으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보니 이야기꾼은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전례가 없었다. 춤과 노래, 공예와는 다르게 이야기는 전승계보가 어렵기 때문인 것 같아 보였다. 잘됐다. 내가 1호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야기꾼 무형문화재 1호. 혁이창.
황당하고. 아주 좋다!
내 욕망과 내 시간, 내 땀과 내 눈물로 되찾은 나의 광복의 날이었다. 2024년 8월 13일!
마침 광복절의 이틀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