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2, 무나씨의 <우리가 지워지는 계절에>에서.
우리가 지워지는 계절에
20251212- 20260213
스페이스K 서울
글쓰기 능력을 기르는 방법을 물으면 많은 작가들은 ‘매일 쓸 것’을 말한다. 나도 자랑이든 아니든, 좋든 싫든 일이 있건 없건 무엇이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이기는 하다. 그런데도 본인이 생각하는 어떤 수준에 오르지 못한 나 같은 사람들은 그제야 깨닫곤 한다. 아, 그건 일단 쓰라는 얘기지 쓰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는 아니구나. 그렇다고 동경하는 이의 글을 읽고 한참 그 ‘투’에 취해 뭔가를 쓰고 나서 돌아보면 그만큼 우스운 글도 없다. 돌아서 내 글을 쓰고자 하면 발전이 없고 지긋지긋하다. 손만 놀리지 게으른 머리와 마음 때문일까. 늘 썼는데도 왜 이렇게 쓰기가 어렵고, 하던 일 하기가 어려운지.
미술관에 걸린 대형 작품 중에 수없이 비슷한 터치의 붓질이 스쳐간 흔적을 보고 있으면 또 그런 질문을 할 때가 많다. 이렇게 반복적인 작업 끝에, 작가는 무엇을 보았을까. 반복은 무엇이 되는가. 이 질문을, 무나씨의 <우리가 지워지는 계절에> 전시를 보며 생각했다.
요즘의 세상에 ‘우리’라는 것만큼 연약한 약속의 말도 없는 것 같다. 흐릿한 공동체성과 연대에 기대어, 그러나 각자도생조차 벅찬 일상은 우리라는 말을 점점 지워간다. 때로 혼자 있으나 더욱 혼자 있기를 간구한다. 그래야 원하는 명상과 위로가 가능할 것 같아서다. 나의 경우 휴대폰 중독으로 그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러나 막상 작품을 보면 홀로 있는 작품이 얼마 없다. 둘 또는 그 이상이 어떤 몸짓이나 특정한 자세를 하고 있는데도, 보고 있으면 명상에 젖어들게 된다. 그 포즈들은 사실 일상적이지 않다. 바닥에 엉키어 누워 있고, 밀착된 거리에서 서로의 얼굴 근처를 매만지거나 스쳐가고, 잡아당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마음이 고요하게 잦아드는 것은 아마도 먹을 주재료로 검은색 단일 톤을 사용하기 때문에 오는 느낌인가 싶고, 또한 화면 속 인물이 어떠한 표정도 띠고 있지 않기 때문인가 싶다.
또한 이 고요함은 상대적으로 ‘함께 있는 순간’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메시지도 볼 수 있다. 당장이라도 퇴근해서 집에 혼자 있고 싶고, 불현듯 혼자 어디론가 떠나는 등 기꺼이 혼자되어 명상이 가능한 상태가 되기를 간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렇지 않은 일상을 사는 이들이 많다는 증거일 거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함께 무엇을 공유하고 즐거워하거나, 서로 감정을 무시한 채 각자의 의지대로 타인과 어울려 있다.
화면 속 인물이 홀로 있는 작품에서조차, 인간은 혼자 있을 수 없다. 실제로 물에 몸을 담근 상태가 아니라, 가상의 수면과 마주친 인간은 그 속에서 하는 수 없이(?) 자신을 발견한다. 명상을 하고 싶어도 명상을 하지 못하는 나, 과호흡이 온 건 아닌지 호흡이 너무 신경 쓰이는 나, 나만 명상할 때 이런 건가 싶은 나 등 원치 않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럴수록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홀로 되어 무엇을 찾기를 바랐는지 길을 잃게 된다. 결국 함께 있으나 혼자 있으나, 바라는 것은 비슷하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추측이다. 마치 부처와 비슷하게 생긴 인물들의 표정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이 모든 행위나 자세들은 화면 전체의 톤과 배경과 어우러져 명상이나 수행으로 향하는 여정처럼 느껴진다.
작품에 좀 더 가까이 서서 들여다보면 발견하게 되는 것이, 수없이 그은 붓의 흔적이다. 붓이 맞나, 다른 도구가 아닐까 싶게 가느다란 선들. 이 연약한 선이 모여 음영과 경계, 면을 이룬다. 이 선을 수없이 반복해 그으며, 작가는 작품 속 인물들과 같은 순간을 맞이했을 것 같다. 혼자 있어도 함께 있어도 결국 ‘나’로 돌아가는 쉽지 않은 과정을. 앞서 의문을 품었던 ‘반복은 무엇이 되는가’의 관점에서, 작가는 반복을 반복 같지 않게 한 것 아닐까 싶다. 저 여린 선 한 줄마다 담고 있는 작가의 순간과 감정은 다 다르지 않았을까? 메시지가 아무리 엄청난 사유와 거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채우는 순간은 다르니까. 우리의 매일이 아무리 그날이 그날 같아도 순간 순간을 뜯어보면 그렇지 않으니까. 사실, 누구나 그러하니까.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고사관수도>와 병풍 형태의 <마음을 담아> 앞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두 작품이 앞뒤로 배치되어 있어 저 위에서 지난 어떤 날을 떠올리는 느낌이다. 반복으로 무엇을 빚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내지는 무력함 속에, 어제가 된 나날들에서 굳이 날마다의 의미를 찾으려다 얼마나 나아가지 못했는지가 새삼 떠오른다. 반복이 무엇이 되지 못하더라도 나는 내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후회스러움이 저 물결처럼 피어오른다.
그러니 날마다의 목소리를 따라가고 싶다. 걷는 것이 두 발을 앞으로 내딛는 일의 반복인 것처럼, 굳이 반복을 의미나 결과를 담보한 과정으로 해석하지 말고. 아무것 되지 못해도 괜찮은 나만의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저벅저벅.
어쩌다 보니 이 계절에 지워진 것은 우리가 아니라 일종의 강박이 되었다. 어쩌면 각자의 이런 생각으로 이끌고 싶었던 것이 작가의 의도였을까? 이렇게 오늘도 의미에의 강박을 끊어내기에 한 번 더 실패한다. 마침내 이런 마음이 지워지는 계절을, 나는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