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44페이지
미술관에 가는 날은 언제나 즐겁고 설렌다. 오늘은 어떤 작가의 이야기일까? 오늘은 어떤 그림을 만날까? 오늘은 어떤 작품이 눈에 들어올까? 미술에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미술관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나에게 또 다른 영감을 주고 나의 심미안을 높여주는 것 같아 나는 여유가 있는 날이면 미술관을 찾는다.
최근 ‘데이비드 호크니‘의 전시를 본 적이 있다. 다양한 작품들 중에 나의 발걸음을 한동안 멈추게 한 작품이 있었다. “태양 혹은 죽음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음을 기억하라 “라는 문장 아래 커다란 태양빛이 점점 산 뒤로 사라지는 그림이었다. 난 그 그림이 주는 메시지와 색감들 그리고 그림의 움직임을 보며 순간적으로 매료되었다. 작품을 유심히 보다 보니 그림 속 태양빛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점점 다가와 나를 태양빛으로 커다랗게 감싼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하더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글쎄… 나에게 따뜻한 기운이 필요해서였을까? 아니면 그 태양빛이 나의 인생을 밝혀준다고 느껴서였을까? 무엇이 나를 눈물 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태양빛이 나에게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곧 나의 삶이 찬란하게 빛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생처음이었다. 그림을 보고 울 수 있는 경험말이다. 난 데이비드 호크니를 직접 만나적도 없고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다. 그 사람은 나의 존재 자체를 모르겠지만 난 그의 작품을 통해 그를 만났고 그의 그림을 통해 위로와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 위대한 작업 앞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사실 난 유명한 작가가 아니지만 나 또한 누군가에게 내 책이 큰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한다. 나의 글을 읽으며 한 번의 미소가 지어진다면 그걸로도 감사하고 한 번의 끄덕임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 하나의 문장이라도 당신의 목마름을 적셔주었다면 난 그것을 위해 나의 온 시간을 바쳐 글을 썼노라 하고 말하고 싶다.
이제 겨우 내 인생 44페이지를 써내려 간다. 아직 끝나지 않은 스토리이다. 앞으로 50페이지…60페이지… 또 어떠한 이야기들로 내 인생이 채워질지 너무 궁금해진다. 지금도 펼쳐진 40대의 인생은 가볍지만 않은 인생이다. 그러나 가볍게 살기로 다짐하며 내 안의 모든 영역과 외부와 연결된 모든 영역들을 조금씩 털어내며 정리해가고 있는 중이다.
살면서 말이다. 사뿐사뿐 걸어본 기억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글쎄…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울 때였을까? 아니면 기분 좋은 어느 날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 걸음이었을까? 나이가 들수록 걸음걸이가 느려지고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게 아무래도 삶의 무게가 실려진 탓이 아닐까 싶다. 인생의 중반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 40대의 삶. 다시 가벼워진 발걸음을 느끼고 싶다. 어느 길로 걸어가야 사뿐사뿐 걸어가다 웃으며 뛰어갈 수 있을까? 내 인생에 또 다른 나를 찾기 위한 그 길 앞에서 나는 두려움이 아닌 고민과 걱정이 아닌 그저 설렘과 희망을 안고 거침없이 내 인생 44페이지를 아름답게 써내려 갈 것이다.
이제야 나스럽다.
내 미소가 보이기 시작했고, 내 웃음소리가 자주 들리고, 내 목소리가 밝아졌고,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시 꿈이 생겼고 다시 일어날 힘이 생겼고 다시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생겼다. 이제야 내가 보인다. 이제야 지나온 세월이 보이고 이제야 계절이 느껴지고 이제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감을 느낀다. 이제야 40대인 내가 50대를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지 조금씩 그림이 그려진다.
이 모든 것들은 글을 쓰면서 내가 보이기 시작했고 글로 토해 내면서 내가 치유되었다. 이번 내 인생 44페이지에는 이렇게 기록될 것이다. ”찾았다! 정인숙! 이제야 나를 만났다. 다시는 널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태양빛이 너를 덮치듯 너의 남은 인생이 찬란하게 빛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꿈꾸자. 아직도 여전히 빛나는 너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