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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기랜드 May 23. 2023

끼리끼리 (13)

가지치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 많은 세월 동안 나를 스쳐간 인연과 내가 붙들고 있는 인연들을 하나둘씩 떠올려본다.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연락처 목록을 한번 쓱 훑어보니 생각보다 많은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는 않았다. 생활에 필요한 학원번호, 관리실번호, 보험번호 등등 이런저런 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핸드폰에는 가족과 함께 지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고작 50명도 채 안 되는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막상 또 그 번호들을 살피고 살피면 정작 마음 편히 바로 전화할 수 있는 유일한 번호는 딱 하나! 그건 바로 아주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나의 절친 희정이다. 우리 사이는 서로의 속을 다 뒤집어 까도 될 만큼의 우정이 깊다. 못할 말도 없고 안 할 말도 없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런 친구 하나를 만났다는 것은 행운이고 복되고 감사할 일이다. 어떠한 험담도 용납되고 대화에 의심이 없으며 많은 위로를 받고 또 만나기만 해도 그 자체가 힐링이 된다.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적인 교류로 본다면 말이다.


난 희정이와 많은 약속을 한다. 꼭 같이 여행 가자, 꼭 같이 술 한잔하자, 꼭 같이 쇼핑하자, 꼭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등등 뭐 딱히 특별한 것을 하자는 얘기는 아니지만 멀리 살다 보니 자주 만날 수 없다 보니 사소한 것이라도 함께하면 그게 추억이 되어 언제든 얘기해도 행복한 이야기가 된다. 내 곁에 그것도 35년 넘게 나와 인생을 함께 걸어와준 친구가 있어서 오늘도 살아가는 길이 외롭지만은 않다.


반면 살다 보니 친구사이도 시간이 흐를수록 관계가 깊어지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함께 갈 수 없는 친구가 생긴다는 것도 경험하게 된다. 씁쓸한 일이지만 최근 나는 학창 시절 나름 소중했던 친구와 결별을 맞이했다. 고등학교 시절 풋풋했던 추억들을 함께 나누었던 동창 친구들이 몇 있다. 다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바쁘게 살다 보니 자주 모임을 갖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어쩌다 한 번씩 안부 전화를 할 때면 또 그렇게 그립고 반가운 사이가 된다.


그중에서 진이라는 친구와는 매년 생일날에만 축하문자를 보내던 사이였는데 가끔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게 되면 꼭 통화 후에는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몇 년 만에 생각나서 전화를 하면 “네가 웬일이야? 안 죽고 살아있네! 별일이네 전화를 다하고..” 이게 통화의 첫마디였다. 그럴 수 있다. 웃고 넘길 수 있다. 그런데 매번 같은 반응이면 전화하기가 싫어진다.


또 그렇게 몇 년 잊고 살다가 친구들이 그리워져서 명절날을 이용해 친정과 가깝게 사는 동창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 저녁에 잠깐 얼굴이라도 보자며 약속을 잡았다. 정말 오랜만에 동창 셋이 모이는 자리였다. 아니다. 진이와 영이는 같은 지역에 살고 있어서 나름 자주 왕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셋은 카페에 앉아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별일은 없었는지 자신의 삶을 나누고 있는데 갑가지 뜬금없이 진이가 나한테 “근데 남편 월급이 얼마야?”라고 물었다. 순간 당황스러워서 “그게 왜 궁금해?”라고 답했다. 그러자 진이는 “아니 그냥 내 남편보다 많이 버나 궁금해서”라고 말했다. ‘이건 또 뭐지… ’살짝 어이가 없었는데 옆에 있던 영이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며 민망해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진이는 “우리 남편은 사백 벌어! “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많이 번다. 네 남편! 멋지네…“라고 답해줬다. 그러자 진이는 내  차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래서 난 영이에게 “이거 굳이 말해야 해?”라고 물었고 영이는 자기 남편은 버는 게 별로 없어서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갑자기 불편한 자리가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굳이 몇 년 만에 만나서 그것도 자리에 앉은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남편월급을 공개하라니 참 오래된 친구이지만 실망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래서 난 한마디만 했다. ”진이야! 억대 연봉 아니면 말하지 말자 “라고 말이다. 굳이 그걸 알아서 뭐 할 것이며, 굳이 그걸 비교해서 뭐 할 것이며, 굳이 남편 월급이 나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난 참 수준 낮은 대화로 여겨졌다. 그런 예민할 수 있는 사적인 대화를 아무렇지 않게 나누기에는 평소 우리 사이에 연락이 깊지 않았고 나에 대한 예의가 느껴지지 않는 태도로 여겨졌다. 그날 우리 셋은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셨고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그러나 그 후로 지금까지 우린 연락을 하고 있지 않다. 아니 이제 연락을 하고 싶지 않다. 이젠 놓아야 할 관계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살다 보니 관계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앞으로 살아가는 길에 굳이 불편한 사람을 곁에 둘 필요가 없고 대화가 안 되는 사람과 대화를 이어갈 필요가 없고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이어가는 모임이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단호히 끊어내는 것이 맞다고 본다. 어릴 때는 친구 없이는 못 살았지만 나이가 들다 보면 친구 없이도 잘 사는 법을 배우게 된다.


40대에도 새로운 관계를 확장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양육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모임이 많아진다. 유치원 모임, 학원모임, 교회모임, 학교모임, 동네친구 모임 등 등 수많은 모임에 가입되고 활동하게 된다. 특히 아이를 위해 친구를 만들어 주기 위함도 있고 새로운 교육정보를 얻기 위해 모임을 참석하기도 한다. 삼삼오오 모이다 보면 비슷한 나이대에 엄마들끼리 만나게 되어 육아고통을 나누기도 하고 교육방식을 논하기도 하고 요즘 학원들의 정보도 공유하며 그렇게 서로들 돈독하게 합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의 학년이 높아질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고학년이 될수록 부모 도움 없이 아이 스스로 친구 만들기가 가능해져 굳이 학년마다 새로운 학부모 모임을 만들고 관계를 확장한다는 게 큰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이 온다. 간혹 학교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엄마들이 아닌 이상은 그 많은 모임을 다 따라다닐 에너지도 없고 매번 새로운 엄마들을 만난 다는 게 때로는 피곤함으로 느껴져 있는 관계마저도 축소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생각해 보면 정말인지 딱 초등학교 1학년때가 제일 에너지 넘치고 파이팅 하게 되는 학부모 모임이다. 그때 만들어진 엄마들 모임은 고학년이 될 때까지 쭉 이어지는 것 같다. 결국 많은 엄마들과 교제를 하더라도 그 안에서 나와 교육방향이 비슷하거나 아이들끼리 유독 친하거나 또는 대화코드가 잘 맞는 성향끼리 모이게 되니 결국 학부모 모임 안에서도 그룹이 자연스럽게 나누어진다.


그러고 보니 내가 속한 그룹에 나와 함께 있는 엄마들의 스타일은 자기 주도적 성향이 강한 스타일이었다. 특히 워킹맘이 많았고 자식보다는 자신의 삶을 먼저 1순위로 여기며 살아가는 엄마들이었다. 운동이든 공부든 직장이든 무엇을 하든 게으름을 피우는 타입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매번 만날 때마다 새로운 에피소드들이 차고 넘쳤다.


골프에 도전했다가 허리에 침을 맞아도 해외 원정을 또다시 꿈꾸며 계속해서 골프연습에 매진하는 챔맘, 이미 요리를 가르치는 교수인데도 해외 취업을 꿈꾸며 한국어 교원자격증에 도전하는 쭈맘, 그리고 아파트 한채 잘 팔아서 떼돈을 벌었는데도 놀지 않고 생활비라도 벌겠다며 취업에 성공한 윤맘, 우리 모임의 모든 학원 정보를 최신으로 전달해 주는 남보다 발 빠른 정보력과 추진력을 갖춘 라미맘, 그 외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늘 중 고등학교 현장 분위기를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게 얘기해 주는 진정한 워킹맘 린맘과 은맘 등등 모두들 열심히 살아가는 엄마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들의 대화는 자녀의 이야기를 포함하면서도 나 자신의 삶을 좀 더 발전적인 것들로 채워 나 기기 위해 나름 자신의 삶을 최선으로 이끄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때 주식의 주 자도 몰랐던 내가 이 모임에서 공모주 주식의 붐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되기도 했었다. 우리들은 커피값, 치킨값, 학원비 값을 벌어 보겠다고 엄마들과 공모주에 합심한 결과 그해 소액으로 시작한 공모주에서 연말에 백만 원 이상의 수익을 내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모두들 주식의 맛을 본 이후 각자 열심히 주식을 하고 있으나 요즘은 하락세여서 다들 울상이다. 그래도 투자에 대한 새로운 길을 열게 되어 좋은 경험을 했다고 본다.


난 그런 게 좋다. 새로운 희망이 있는 모임이 좋고, 응원해 줄 수 있고 축하해 줄 수 있는 모임이 좋고, 자기 계발에 힘쓰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좋다. 그렇게 내 인생길 가운데 만난 학부모 엄마들은 현재 내가 소중히 붙들고 있는 인연 중에 하나이다. 같은 시기에 같은 육아를 경험하며 서로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며 그렇게 아이들의 학창 시절이 좋은 추억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린 여전히 끼리끼리 모여 가끔은 재테크도 연구해 가며 기분 좋은 수다를 잘 이어가는 모임을 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길에 수많은 인연들을 스칠 텐데 관계 안에서 나의 삶이 풍성해지길 원한다면 이제는 불필요한 관계들은 가지치기를 하고 귀한 열매 즉, 귀인을 내 곁에 가까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귀인을 만나기 위해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은 바로 내 삶의 퀄리티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새로운 상대를 만날 때에는 오픈 마인드를 가지고 나이와 경험에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고의 유연성을 갖춰야겠다. 또한 어떠한 주제로도 서슴없이 대화할 수 있는 다양한 지식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는 나름의 전문성을 더 키워야 하겠다. 나만의 매력으로 상대를 대하는 기본적인 매너들을 갖추며 그렇게 내적 외적 스펙들을 하나씩 쌓다 보면 나 또한 누군가에게 좋은 귀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결국 귀인은 귀인을 알아보는 법! 나 또한 상대방에게 좋은 귀인이 되어주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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