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터스 123과 씨름하며 밤을 새웠다

데이터라는 신세계에 처음 발을 들인 순간

by 기타치는 사진가

‘IP’라고 하면 지금은 누구라도 IP 주소를 떠올리겠지만, 천리안에서 IP는 정보제공자 Information Provider였다. 하이텔보다 유일하게 앞세울 수 있는 것이 유료 정보 서비스였던지라 IP를 발굴하고 상담하는 일을 담당하는 IP영업부는 당시 천리안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부서였다. 20명의 장교출신 신입사원 역시 대부분 IP영업부로 배속되었다.


지금은 누구나 손쉽게 웹사이트를 만들어 콘텐츠를 공개할 수 있고, 모든 증권사나 금융기관이 자사의 모바일 앱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인 90년대에는 천리안이나 하이텔을 통하지 않고서는 정보를 제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다시 말하면 정보를 제공하는 경로를 PC통신 업체들이 과점하고 있는 상태였다.


정보제공자와 소비자는 다수지만 정보를 유통하는 채널은 두 개밖에 없는 상황에서 권력은 유통하는 쪽에 치우치게 되어 있다. 천리안은 특히 유료로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에 특화되어 있다 보니 천리안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까다롭게 심사하고 정보의 내용이 부실하다거나 상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IP ‘영업부’라고는 하지만 필요한 정보 제공자를 찾아다니며 영입해 오는 영업맨이라기보다는 입점 허가권을 쥔 심사위원에 더 가까웠다.


이런 상황에서 주식 시장의 분석 정보는 가장 고가의 정보였다. 분당 300원이 일반적이었고, 500원을 받는 서비스도 있었다. 고급 정보의 경우 천리안의 독점력은 조금 무디어지기는 했다. 하이텔과의 경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수익률을 분배하는 비율에서 IP 업체가 유리한 대우를 받곤 했다. 천리안이 IP에게 제공하는 정보제공 대가는 50%가 일반적이었지만 고급 정보라면 70%까지 대가로 제공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50%라는 정보제공 대가는 정보를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수수료가 50%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전체 서비스를 총괄하는 서비스기획과로 배치받아 메뉴화면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지금처럼 화려한 그래픽으로 장식된 화면은 아니었고, 검은 화면에 흰 글씨로 번호를 붙여 나열된 메뉴 구조였지만 어느 단계, 어느 위치에 서비스가 자리 잡느냐에 따라 이용량은 크게 달라졌다. 새로운 IP를 오픈할 시점이 되면 회의실에 모여 품평회를 거친 후 서비스 개시 요청을 위한 협조문을 관련 부서에 보내는 게 내 일이었다. 딱히 크게 고민할 게 없는 단순한 서류 작업이 대부분이었다.


틈틈이 신입 사원 교육을 받으면서 서류 작업을 처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조금 묘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IP 업체에서 방문하여 담당자와 회의를 하고 함께 나가고 나면 며칠 후에는 ‘콘텐츠가 보강되었다’는 명목으로 메뉴 변경 요청이 들어오곤 했다. 같은 화면이라도 순서에 따라 이용료 매출이 두 배까지도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메뉴 위치를 변경하는 것은 아주 민감한 일이었지만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청이 들어온 대로 문서를 작성하여 관련 부서에 보내는 것 말고는.


궁금해졌다. 메뉴 위치에 따라 얼마나 사용량이 달라지는지 알고 싶어졌다. 우리가 만들어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자들이 얼마나 이용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었다. 아마도 운영부서와 영업 담당자, 부장급 이상의 관리자만 이따금씩 확인하는 듯했다. 운영부서에 서비스별 이용량 데이터를 요청했다. 하지만 며칠 뒤 내 손에 들어온 것은 데이터로 처리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텍스트 뭉치였다. 서비스별로 이용 시간이 나열되어 있기는 했지만 ‘2:34:25’ 형식의 택스트 데이터였다. 데이터를 초단위로 환산하여 다시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담당자는 바쁘다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숫자로 가득 찬 텍스트를 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는 동안 바빠서 데이터 수정을 못해준다던 그 담당자는 정시에 퇴근을 했다.


선배들에게 수소문해서 숫자를 다루는 스프레드 시트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았다. 로터스 123을 설치하고 기능을 살펴봤지만 내가 원하는 기능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당시 내 실력으로는 다양한 함수를 이용하여 데이터를 가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 잠시 한숨을 쉬고는 천 개 정도에 달하는 데이터를 손으로 수정하기 시작했다. 시간:분:초로 되어 있는 데이터를 각각 시간, 분, 초 칼럼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간단한 수식으로 초로 환산하는 아주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꼬박 이틀 동안 야근을 해야 했다.


데이터를 정리하는 작업이 끝난 후 ‘메뉴 변경 요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메뉴 상의 순서와 이용량의 순서가 크게 차이가 나는 곳부터 고쳐 나가기 시작했다. 영업부서에서 들어오는 요청대로 메뉴를 수정하기는 했지만 다음 달 순위에서 밀리면 원래 위치로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므로 팩트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정보에 대한 수정이나 PC통신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으신 독자께서는 댓글로 자유롭게 참여 부탁드립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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