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적인 메뉴 개편 작업
로터스 123으로 시작했던 작업은 몇 달이 지나면서 쿼트로 프로로 바뀌었다. 로터스 123보다 훨씬 막강한 기능으로 작업은 많이 수월해졌다. 어느 정도 간단한 함수는 손쉽게 다룰 수 있게 되어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서너 달 치의 데이터를 다루다 보니 스프레드 시트로는 한계에 이르러 또다시 선배들에게 수소문을 해서 DBaseⅢ라는 프로그램을 쓰게 되었다. 업무 시간에는 문서 작업과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어, 퇴근 시간 이후 사무실에 남아 책을 뒤져가며 사용법을 익혔다. 지금처럼 AI가 모든 작업을 도와주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DBaseⅢ를 다루다 보면 자연스럽게 클리퍼라는 프로그램도 다루게 된다. 클리퍼는 DBaseⅢ에 있는 데이터를 다루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실행파일(exe)로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반은 업무에 필요하기 때문에, 반은 내가 재미있어서 쿼트로 프로, DBaseⅢ, 클리퍼를 붙들고 야근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렇게 얻은 지식을 사용할 일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94년 초 나우누리가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PC통신 시장에서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사용자 중심의 민주적 PC통신’을 표방하며, 적극적으로 동호회를 모집했고, 사설 BBS를 서비스 내부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바람을 불러오고 있었다. 피씨서브와 천리안Ⅱ가 뒤죽박죽 섞여 있던 기존의 메뉴 화면 체계로는 더 이상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천리안은 전면적인 메뉴 개편 작업에 들어갔다. 메뉴 화면을 담당하던 내가 전담해야 하는 일이었다. 업무를 지시하던 과장의 표정에 언뜻 스쳐 지나가던 미안함은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다.
그동안 컴퓨서브와 프로디지, 아메리칸온라인 등의 해외 서비스를 벤치마킹하면서 정리한 내용으로 커뮤니티, 콘텐츠, 커머스로 세 단계로 메뉴를 나눴다. 전자우편, 동호회, 게시판 등 사용자 위주로 만들어지는 서비스를 커뮤니티로 묶고, 뉴스, 취업, 증권 등 IP가 제공하는 서비스들을 콘텐츠로 묶었다. 쇼핑과 공연 예약 등의 서비스는 커머스 그룹으로 묶었다.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첫 화면을 확정했다. 문제는 하위 화면에 개별 서비스를 재배치하는 일이었다.
2,000개 가까이 늘어난 서비스를 수백 개의 화면으로 구성하고, 이를 텍스트 문서로 정리하는 일은 말이 안 되는 작업이었다. 하나라도 빠뜨리게 되면 큰 일이니 말이다. 이때 이미 만들어 두었던 DBaseⅢ의 데이터가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데이터베이스에 각 서비스가 해당하는 메뉴를 지정해 주고 클리퍼로 이 데이터를 불러와 새로운 천리안 화면을 시뮬레이션하는 프로그램을 짰다. 메뉴 화면을 이동하는 명령어도 실제 천리안과 똑같이 작동했다. 메뉴 화면상의 순서는 철저하게 이용량 순서였다.
역시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짜느라 며칠을 야근하며 보냈다. 워낙 방대한 작업임을 알고 있는 동료들은 먼저 퇴근하며 미안한 표정으로 수고하라는 인사를 건네곤 했다. 하지만 내심 즐거웠다. 일단 프로그램 짜는 일이 즐거웠고, 내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이 재미있고 신기하기도 했다. 아이디어를 짜내고 코딩을 하고 디버깅을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프로그램이 완성되고 메뉴 개편에 관한 개요 등을 정리한 간단한 기획안과 함께 클리퍼로 짠 천리안 시뮬레이터 프로그램을 3.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복사하여 관련 부서에 배포했다. 다들 ‘이게 뭐냐?’는 반응이었다. “디스크에 있는 프로그램 실행시키시면 됩니다. 보시고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수백 장의 메뉴 화면 수정안을 기다리며 걱정을 하고 있던 동료들은 다들 놀라워했다. 어떤 사람은 ‘콘텐츠가 안 보인다’며 찾아오기도 했다. 온라인으로 연결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화면 구성을 미리 보기 위한 시뮬레이션이라는 설명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모니터에서 실제 천리안처럼 돌아가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덕분이었는지 메뉴 개편안은 크게 무리 없이 통과되어 운영팀에서 개편 작업에 들어갔다. 얼마 후 나를 데이터로 괴롭혔던 운영부서 직원이 뒤머리를 긁적거리며 나를 찾아왔다.
“혹시 지난번에 준 시뮬레이터 프로그램 소스 좀 줄 수 있어요? 화면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코딩하려니 너무 힘드네요.”
뭔가 미안해하는 표정을 보니 예전에 내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했던 일을 잊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도 심술을 부려볼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의 불친절 덕분에 내가 얻은 게 너무 많았다. 어찌 보면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내가 스프레드 시트는 물론이고 DBaseⅢ와 클리퍼를 쓰게 될 일은 없었을 테니 오히려 고마웠다.
“바로 보내드릴게요.”대답하고 서랍에서 플로피 디스크를 꺼내 포맷을 시작했다. 디스크 드라이버의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헤드가 디스크를 긁는 소리가 이처럼 경쾌하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인 기억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므로 팩트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정보에 대한 수정이나 PC통신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으신 독자께서는 댓글로 자유롭게 참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