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BAND PEACE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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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택시 속에서의 첫 만남

by 이문웅 Dec 3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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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로는 유령도시 같았다. 낮 동안 차들이 빽빽했던 대로는 밤이 되자 적막했다. 이따금 지나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만 길 위를 스치고 사라졌다. 간판 불빛도 대부분 꺼져 있었고, 가끔씩 보이는 배달 오토바이들이 엔진 소리로 침묵을 깼다. 기호는 운전대 위에 손을 얹고 거리를 바라보며 또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이 모양이지…”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코로나 이후로 손님은 절반도 줄었다. 특히 밤에는 손님을 태우기 힘들었다. 한때 활기가 넘쳤던 강남도 이제는 조용한 그림자만 남아 있었다. 몇 시간 동안 거리를 빙글빙글 돌았지만, 승객을 태운 건 두 건 뿐이었다. 전부 짧은 거리. 겨우 기름값이나 벌 정도였다.


그는 라디오를 켰다. 뉴스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코로나 확진자 수와 거리두기 단계 이야기가 이어졌다.

“확진자 천 명 돌파…”

기호는 다 듣지도 않고 라디오를 꺼버렸다. “에휴, 지겨워…”


그때였다. 길가에서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눌러쓴 모습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기호는 천천히 차를 멈췄다.


남자는 타면서 “이태원까지 가시죠.”라고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라고 짧게 말하곤 이내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문이 닫히자 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수현은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그는 기호가 볼 수 없는 방향으로 마스크 너머에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호는 룸미러로 슬쩍 뒷좌석을 봤다. 수현은 피곤한 얼굴로 보였다. 눈가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쓴 탓에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분위기에는 지친 기운이 묻어났다.


“요즘 이태원 손님 별로 없던데요.” 기호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수현은 창밖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러게요. 거긴 더 조용하죠. 가게들도 다 문 닫았고…”


기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다들 먹고살기 힘든 건 매한가지구나.’


침묵이 다시 차 안을 채웠다. 기호는 몇 번이나 뒷좌석의 남자에게 말을 걸까 망설였지만, 마땅한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라디오를 다시 켰다. 이번에는 음악 채널이었다.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차 안을 채웠다.


수현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그는 고개를 살짝 들어 리듬에 맞춰 머리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듯 손가락이 리듬에 맞춰 움직였다.


기호는 룸미러로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웃음을 지었다. “음악 좋아하시나 봐요?”


수현이 눈길을 들어 룸미러 속 기호의 눈을 잠깐 마주쳤다. “네, 이런 곡 들으면 좀 풀리더라고요.”


기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곡을 바꿨다. 이번엔 신나는 펑크 리듬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수현은 더 적극적으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리듬을 튕기며 베이스 라인을 흉내 냈다. 그는 마치 음악에 완전히 빠져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기호는 그런 수현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발끝으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기타 애드리브를 상상하고 있었다. 오래전 밴드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했다.


수현은 눈을 감은 채 작은 목소리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그의 몸짓은 마치 실제로 연주를 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기호는 음악을 한 곡 더 넘겼다. 이번엔 클래식 록 발라드가 흘러나왔다. 수현은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눈을 감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기호는 그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태원 골목 쪽으로 들어가 주세요.” 수현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기호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 네.”


차는 조용히 골목으로 들어섰다. 라디오에서는 마지막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서 내려주시면 돼요.” 수현이 말했다.


기호는 차를 멈추며 뒤를 돌아봤다. “음악 좋아하시는 거, 멋지네요.”


수현은 마스크 너머로 웃는 듯 보였다. “고맙습니다. 좋은 음악 틀어주셔서.”


그는 문을 닫고 골목길로 사라졌다. 기호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라디오를 끄지 않고 계속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차 안은 다시 적막했지만, 기호의 머릿속에는 오랜만에 기타를 치던 기억과 음악에 대한 갈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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