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에서 수현을 내려준 뒤, 기호는 시동을 끈 채 운전대에 손을 올려놓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이태원의 거리도 텅 비어 있었다. 한때는 외국인들로 북적이고 술에 취해 웃음소리가 넘치던 이태원의 골목들이, 이제는 어둠 속에서 기이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흔들리던 네온사인마저 꺼져버린 거리에는 간간이 배달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만이 울렸다.
조수석 옆에 꽂혀 있는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식어서 찬 커피가 입안에 쓴맛만 남겼다. 그 쓴맛이 이상하게 마음속 깊은 곳을 긁는 것만 같았다. 마치 지금 그의 삶과 닮아 있었다.
“음악이라….” 기호는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방금 전 수현이라는 손님이 차 안에서 보여준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음악이 나오자마자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베이스 연주하듯 움직이던 그 몰입의 순간. 기호는 그 장면이 단순히 취한 사람의 이상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차 안에 울리던 그 음악, 그리고 수현의 손가락 움직임이 마치 무언가를 깨우는 듯했다. 음악에 대한 갈망. 오래전에 자신이 품었던 그 뜨거운 열정이 다시 서서히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기호는 마스크를 끼고 고개를 흔들었다. “한때는 나도 저랬지….”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조수석 아래로 내려갔다. 거기에 놓여 있는 낡은 가죽 가방이 보였다. 가방 속에는 늘 가지고 다니는 기타 피크가 들어 있었다. 더 이상 연주할 일이 없어도, 그는 그 피크를 버리지 못했다. 버리는 순간, 자신의 꿈을 완전히 포기한 것만 같아서였다.
고개를 젖히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하늘은 탁한 회색빛이었고, 가로등 불빛은 희미하게 퍼져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오래된 사진첩을 열었다.
사진첩에는 오래된 밴드 시절의 추억이 가득했다. 허름한 연습실에서 찍은 사진, 고장 난 앰프를 고치는 모습, 그리고 작지만 열정적인 무대 위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자신. 그 사진 속의 자신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열정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는 음악이 그의 전부였다. 밤새도록 기타를 쥐고 연습하던 날들. 손가락이 물집투성이가 되고, 그 물집이 굳은살로 바뀌어도 멈추지 않았던 시간들. 그 시절, 그의 삶은 모든 것이 간단했다. 단 하나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대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밴드는 이름을 알리기도 전에 해체되었고, 졸업 후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음악은 현실이라는 높은 벽 앞에서 무력했다. 기타는 방 한구석으로 밀려났고, 점점 먼지가 쌓였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기호는 혼잣말을 했다.
라디오를 켰다. 차 안에는 오래된 록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리듬을 탔다. 왼손은 허공에서 코드 진행을 그렸고, 오른손은 가상의 줄을 튕겼다. 잠시나마 그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그는 한동안 그 음악에 몰입하다가 갑자기 핸들을 꽉 잡았다. 뭔가를 결심한 듯, 차를 돌려 강남 쪽으로 향했다.
기호는 어느샌가 낙원상가에 있는 한 악기 매장 앞에 차를 멈췄다. 가게는 이미 문을 닫았지만 쇼윈도 너머로 보이는 기타들이 빛을 받고 있었다.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깁슨 레스폴, 그리고 기타의 거대한 앰프들. 기호는 유리창을 통해 그 악기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 중 하나만이라도 다시 내 손으로….” 그는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차 유리창에 닿았다. 그리고 오래전 자신의 손끝에 남았던 굳은살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그의 손은 너무 부드러워져 있었다. 기타를 놓은 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한 번쯤은….” 기호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는 라디오의 볼륨을 더 크게 올렸다. 차 안에는 기타 솔로가 울려 퍼졌고, 그는 다시 한번 그 멜로디에 몰입했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