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의 좁은 골목길 한편에 자리 잡은 오래된 단층 건물. 허름한 간판 아래로 빛바랜 철문이 보였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고, 좁고 어두운 계단이 지하로 이어졌다. 그곳이 수현의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자리였다.
수현은 매일 자정 무렵, 청소 도구를 챙겨 건물 구석구석을 돌았다. 사무실에서 비어 있는 책상과 의자들을 닦고, 유리창을 반짝거리게 하며,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 남겨진 커피 찌꺼기를 비웠다. 사람들의 흔적은 그에게 일거리였지만, 정작 그 사람들과는 한 마디도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의 존재는 철저히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러야 했다.
"어휴... 또 이 커피." 수현은 찌푸린 얼굴로 회의실 테이블에 남겨진 종이컵을 들어 올렸다. 안에는 식어서 굳어버린 커피가 남아 있었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컵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5년. 처음에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무감각해졌다. 이른 아침에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그는 거의 비몽사몽이었다.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나면 밤이 되었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의 삶은 그렇게 무한 반복이었다.
퇴근길,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수현은 익숙하게 골목길을 빠져나와 항상 가는 작은 술집으로 향했다. 그곳은 늘 조용했고, 몇 명 안 되는 손님이 각자의 테이블에 앉아 말을 섞지 않았다.
"소주 하나랑 안주 아무거나 주세요."
수현은 항상 같은 주문을 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그는 그날의 피로를 해소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떠오르는 건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이었다.
수현의 젊은 시절은 음악이었다. 고등학생 때 처음 베이스 기타를 잡았고, 그때부터 음악은 그의 전부였다. 친구들과 작은 밴드를 만들어 공연장을 찾아다니며 연주했다. 좁은 무대 위에서 베이스를 치며 몸을 흔들 때면, 세상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울려 퍼지는 저음은 그 자체로 그의 삶이었고, 자유였다.
그러나 현실은 꿈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가르쳐 주었다.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밴드 멤버들도 각자 길을 찾아 떠났다. 음악은 더 이상 그의 삶을 지탱해 줄 수 없었다. 그는 악기를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고, 그렇게 음악과의 연결은 끊어졌다.
이제는 가끔 술에 취한 채 휴대전화로 음악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술집에서 나온 수현은 스마트폰을 꺼내 음악 앱을 켰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베이스 라인을 들으며, 그는 걷는 동안 손가락을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마치 그가 연주를 하는 것처럼.
그날 새벽, 택시를 잡아탄 것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차 안에서 들리는 음악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택시 안 라디오에서 울리는 록 음악의 저음이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 멜로디에 빠져들었다. 손가락은 허공에서 베이스 줄을 짚듯 움직였다.
운전석에 앉은 기호는 백미러로 그의 모습을 힐끔힐끔 보았다. “저 사람, 음악에 빠진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입한 모습이었다.
음악 좋아하시나 봐요? 기호는 물었고
수현은 땅이 꺼지는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하고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음악에 몸을 맡겼다.
음악이 바뀔 때마다 수현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다른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손가락, 그리고 점점 더 커지는 고개 움직임. 그 모습은 기호에게도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기호는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기타 애드리브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차 안은 두 사람 모두 말없이 음악에 심취한 상태였다. 라디오의 볼륨은 크지 않았지만, 그 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음악으로 연결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태원에 도착했을 때, 수현은 잠깐 눈을 떴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그는 짧게 말했다. 그리고 요금을 계산하며 택시에서 내렸다.
수현은 택시에서 내리면서 기호와 나눈 짧은 음악적 대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음악을 들으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택시에서의 대화는 그에게 어떤 묘한 즐거움을 주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대화가 너무 반가웠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 그것만이 그가 오랜 시간 동안 갈망했던 것이었기에.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피곤한데도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몇 곡을 찾아들었다. 기호와 나눈 대화에서 나온 곡들이었다. 눈을 감고 음악에 집중하며 그가 나눈 대화의 여운을 음미했다. 이제 그에게 음악은 단순히 시간 때우기나 우울함을 달래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는 그동안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음악이 그의 손끝에서 흐르고, 그의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그동안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왔던 수현에게 음악은 더 이상 옛 추억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 밤, 그는 마침내 그동안 쌓였던 피로를 풀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기호와의 대화가 그에게 가져다준 활력은, 그가 긴 시간 동안 느껴본 적 없는 안도감과 평온을 안겨주었다.
수현은 그날 밤, 오랜만에 진정으로 편안하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