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된다는 낡은 거짓말

가이 스탠딩과 마르크스로 읽는 프레카리아트의 슬픔

by 광규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된다는 낡은 거짓말

가이 스탠딩과 마르크스로 읽는 프레카리아트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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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어둑해진 거리를 걷다 보면 빗속을 가르는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적막을 깹니다. 스마트폰 앱의 알람 소리에 맞춰 쫓기듯 내달리는 배달 노동자들의 굽은 등, 혹은 카페 구석에서 노트북을 켜고 초조하게 다음 외주 작업을 기다리는 프리랜서들의 핏발 선 눈을 마주하곤 합니다.


과거 우리네 아버님들이 들려주시던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하면 언젠가는 번듯한 내 집도 마련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은, 어느새 박물관에나 어울릴 법한 낡고 허망한 신화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죽을힘을 다해 쳇바퀴를 굴리지만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런닝머신 위에서, 우리는 속으로 가만히 묻게 됩니다. 내 땀방울의 가치는 도대체 어디로 증발해 버린 것일까요.




긱 경제가 약속한 자유의 이면

우리는 지금 '긱 경제(Gig Economy)' 혹은 '플랫폼 노동'이라는 세련된 이름표가 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다는 눈부신 '자유'를 약속받았지요. 하지만 그 자유의 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서늘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매혹적인 수사학은, 사실 노동자가 당연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안전망과 책임을 자본이 교묘하게 회피하는 알리바이에 불과합니다. 내일 당장 일거리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짙은 불안, 다치거나 병들어도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그 지독한 고독을 온전히 노동자 개인의 어깨에 지우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서사가 끊어진 존재들, 프레카리아트

영국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은 이토록 벼랑 끝에 내몰린 현대의 새로운 노동 계급을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고 명명했습니다. '불안정한(Precarious)'이라는 단어와 '무산계급(Proletariat)'을 합성한 이 서글픈 이름표는,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우리 시대 수많은 노동자들의 자화상입니다.


"프레카리아트는 그저 가난한 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과거의 안정과 미래를 향한 희망의 서사가 끊어진 채,
오직 예측 불가능한 '현재'만을 견뎌내야 하는 불안정한 존재들이다."
- 가이 스탠딩,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 중


여기에 19세기의 사상가 카를 마르크스의 오래된 탄식을 포개어 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톱니바퀴 속에서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생산물로부터, 그리고 노동하는 행위 그 자체로부터 철저히 '소외'될 것을 깊이 우려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노동은 알고리즘의 차가운 지시에 따라 파편화된 임무를 수행하는 기계의 작은 부속품처럼 취급받습니다. 노동이 내 삶을 증명하고 세상을 가꾸는 신성한 기쁨이 아니라, 그저 오늘 하루의 생존을 연장하기 위한 비루한 몸부림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물건으로 전락한 항태. 이를 "물화"(Verdinglichung)라고 합니다. 우리를 존엄성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악독한 힘을 가졌습니다. 물화와 소외로 가득한 그곳에 더이상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사람들이 버젓이 살지만, 그곳에 인간취급을 받는 이들은 정녕 없는 겁니다. 분명 그곳에 있으나, 없는 이 취급 하는 것. 이것을 '소외'와 '비존재'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을 산술적 가치, 곧 돈으로 환산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념적 폭력이라 할 수 있지요. 이것이 사회에 가득하니 가슴 아픈 일이 도무지 끊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얼굴 없는 사장님과 투명한 감옥

플랫폼 기업들은 종종 노동자들을 '독립적인 파트너' 혹은 '사장님'이라 부르며 치켜세웁니다. 그러나 이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지휘하는 것은 얼굴조차 없는 무정한 '알고리즘'입니다.


별점 0.1점과 고객의 리뷰 한 줄, 그리고 콜을 수락하는 찰나의 속도에 의해 나의 노동 가치가 실시간으로 매겨지는 투명한 감옥. 그 속에서 우리는 자유라는 환상에 취해 스스로를 더욱 가혹하게 채찍질합니다. 땀 흘려 일하는 자의 이마에 맺혀야 할 숭고한 자부심의 자리에, 언제든 다른 이로 대체될 수 있다는 모멸감만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노동의 숭고함을 잃지 않기 위하여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오늘 하루도 각자의 모진 자리를 지켜내며 안간힘을 써서 노동의 무게를 짊어진 당신에게, 마음을 다해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의 얄팍한 통장 잔고가 당신이 쏟아낸 땀방울의 고귀함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결코 당신 자신의 가치를 폄하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노동이 비천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돈의 무게로만 달아보려는 이 세상의 저울이 깊게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이라는 거친 파도가 매일같이 덮쳐오는 이 프레카리아트의 바다에서, 상처받은 우리가 서로의 굽은 등을 다독이며 연대할 때, 비로소 이 차갑고 부조리한 시스템에 작은 온기의 균열을 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에게 평안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 글 예고] 뼈 빠지게 일해도 우리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들어낸 그 거대한 부는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요? 제6화에서는 토마 피케티의 렌즈를 빌려 묻습니다. "노동의 가치가 아파트 한 평보다 못해진 시대." 자본의 증식 속도가 노동의 가치를 압도해 버린 절망적인 현실과, 우리에게 짙은 상실감을 남긴 '벼락거지'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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