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분갈이
알람이 울린다.
방학이라 아이들 등교 준비를 안 해도 되니 긴장을 풀고 더 잔다.
8시가 넘어서 눈이 떠진다.
'아, 일어나기 싫다.'
기대되지 않는 하루를 시작하는 게 힘들다고 생각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거실에는 벌써 아침 햇빛이 블라인드 사이로 아우성이다.
블라인드를 세로로 열어주고 밑에 있는 화분들을 무심히 바라본다.
아이들 방학 후 거의 매일 반복되는 내 모습이다.
오늘은 웬일로 잎이 무성한 스파티필름에 눈길이 갔다. 이사 올 때 지인에게 선물로 받아서 한번 분갈이 후 잘 자라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처음에 왔을 때 꽃이 피어서 온 후 5년 만인 작년에 기특하게 꽃을 피웠다. 그래서였겠지만 무성한 잎 밑에 작은 새끼이파리들이 많이도 나와 있었다. 손으로 한번 들춰보고 나니 아무래도 얘들이 햇빛도 못 받고 자라지도 못하고 힘들 것 같아서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급히 신문지를 깔고 화분을 들어다가 삽으로 밑에 있는 새끼이파리들 뿌리를 살살 올려보는데 잘 올라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밑에서 뿌리가 엉킨 듯 해 화분을 거의 뒤집어서 스파티필름을 통째로 빼냈다. 건강한 모체와 새끼들 여섯 뿌리였다. 세탁실에서 놀고 있는 빈 화분을 다 가져와서 심어 보려니 새끼들 중에도 제법 큰 아이들은 작은 화분에는 택도 없었다. 크기가 맞는 것들만 심어 놓고 남은 뿌리들은 아쉬운 대로 컵에 물을 부어서 꽂아 놓았다. 그러고 보니 옆에 있는 몬스테라도 여기저기로 뻗치고 흙이 꽉 차서 화분이 작다고 아우성치는 듯했다. 그 옆의 군자란은 큰 화분에 모종 3개를 심어놓았는데 제법 커져서 이제 각자 나눠서 심어줘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그동안 식물들한테 너무 무심했네.'
무심하다 못해 무신경하게 물만 주고 키웠던 식물들이 그나마 살아있었던 건 물을 자주 안 주고 흙이 말랐을 때만 한 번씩 주어서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누런 잎이 나와도 떼주지 않고 대충 자리만 이리저리 옮기면서 내버려 뒀던 식물 + 공간이 갑자기 매우 꾀죄죄하게 보였다.
급히 옷을 입고 다이소로 향했다. 큰 화분, 작은 화분, 흙을 넉넉히 사서 돌아왔다.(그전에 남편이 토마토 화분 키운다면서 흙을 살 때 굳이 왜 사냐고 타박하면서도 그때 봐두길 잘했다)
어린 스파티필름들을 작은 화분에 옮겨 심었다. 옮겨준 것만으로도 모체와 새끼들 모두 신나 하는 것 같은 느낌은 뭘까? 몬스테라도 넉넉한 화분으로 옮겨서 심어주었다. (여기에 흙이 엄청 들어가서 다이소에 한차례 더 다녀와야 했다) 군자란도 세 화분으로 나눠서 심었다.
화분들을 나눠서 심고 자리를 잡아주고 보니 그동안 방치한 게 미안했다. 화분 입장에서도 '우리 엄마는 우리에게 전혀 애정이 없어.'라고 느꼈을 것이다. 화분들은 집안의 공기정화와 소소한 인테리어 목적으로 주변에서 선물 받거나 얻은 것들이었다. 데려다만 놓고 관리는 안 하면서 언제부턴가 자리 차지한다고 새눈을 뜨고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죽지 않고 버텨준 게 고마웠다. 버티고 버티다 보니 꿈쩍도 안 할 것 같던 엄마(본인도 예상하지 못함)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손수 옮겨주고 자리를 잡아주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도 오늘 내 행동이 신기했다.
작년 선거날 모처럼 쉬는데 아이들이 놀다가 아레카야자 화분을 건드려 깨뜨려버렸다. 워낙 큰 화분의 물 준 지 며칠 안된 축축한 흙이 베란다 창틀, 하얀 블라인드, 거실 여기저기에 다 튀어서 순식간에 폭탄 맞은 꼴이 되어버렸다. 너무 화가 나 아이들한테 소리를 빽 지르고 이걸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몰라 '하나님 도와주세요.' 기도하면서 걸레랑 신문지를 정신없이 챙겼다. 입주할 때 일부러 화이트로 했던 블라인드에 튄 흙은 아무리 닦아도 자국이 남았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비닐장갑을 끼고 젖은 흙을 화분에 옮기는데 흙냄새가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익숙하고 반가운 냄새에 안도감이 들었다. 두 시간 가까이 도를 닦는 마음으로 시작한 정리가 마무리되는 시점이었고, 휴일을 망쳤다는 부정적 생각도 유야무야 몰아내고 있었다.
그날의 고생이 오늘 나로 하여금 의연하고 빠르게 분갈이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오늘은 비닐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흙을 만졌다. 흙이 거실 매트와 바닥에 튀어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도리어 마음이 차분해졌고, 의미 있는 주말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뿌듯했다. 신문지를 넓게 깔아놓고 작업하는 동안 거실 소파에 앉아서 게임을 하던 막둥이가 이야기했다.
"아, 흙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