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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란 May 20. 2024

시작하자마자 끝나버린 여행 (1)

박티 요가를 처음 접한 것은 바야흐로 12여 년 전, 호주 여행을 갓 시작했을 때였다. 대학생 시절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일찍 깨닫고 전공 수업 대신 철학과 수업을, 시험공부 대신 대학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마음속에는 거창하면서도 단순한 질문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 늘 따라다녔다.


“나는 왜 하필이면 한국에서, 여자로, 이런 부모님 아래서, 이렇게 생겨서 태어났을까?”

“왜 착한 사람들은 고통받고 나쁜 사람들은 즐기며 살아갈까?”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자연재해는 어떤 원리로 일어나는 걸까?”

“영혼이나 귀신은 정말 존재할까?”

“신은 존재할까?”

“사람은 죽고 나면 어디로 갈까?”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취업이 이 질문들을 해결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졸업 뒤 취업은 잠시 접어두고 세계 여행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1년 간 모은 돈을 들고 첫 목적지인 호주로 떠났다.


앞으로 오랫동안 수입이 없을 것이기에 저렴하게 여행할 방법을 찾다가 알아낸 것이 우프(WWOOF-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였다. 우프는 유기농 인증을 받은 농장주가 호스트가 되어 여행객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여행객은 하루 4-6시간의 노동을 제공하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이다. 농장주는 공짜로 인력을 얻을 수 있고, 여행객은 현지인 집에서 살며 문화 체험과 경비 절약을 할 수 있어 일석이조이다. 마침 유기농과 지속 가능한 생활 방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기에 딱이었다.


그렇게 호주에서 우프 농장을 옮겨 다니며 여행을 했다. 우프 동료들과 좋은 농장과 가려야 할 농장들의 정보를 주고받으며 다음 장소를 정했다. 가려야 할 농장이란 보통 한 명 혹은 가족 단위가 운영하며, 공짜 인력을 부리기 위해 호스트가 된 듯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으로 처우가 열악했고 잔소리와 간섭이 심했다. 좋은 농장이란 비교적 규모가 크고 시스템이 잘 갖춰져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이 주어진 곳이었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자 가장 많이 들리는 입소문이 있었다. 바로 “하레 크리슈나 농장”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온 곳이 너무 편해서 이동할 생각이 없었는데, 하레 크리슈나 농장 얘기가 자꾸 들렸다.


하레 크리슈나는 좋은 우프 농장의 조건을 다 갖춘 곳이었다. 일단 사람이 많아 팀, 매니저, 스케줄이 잘 갖춰져 있었다. 식사는 채식으로 맛있고 푸짐하게 나와 많이 먹어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사원이 딸린 영적 커뮤니티로 철학적이고 영적인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말이 제일 솔깃했다. 사실 이게 내가 여행을 시작한 이유가 아니던가! 왠지 그곳에서는 내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당시 갓 관심을 갖게 된 채식을 제공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마침 일요일마다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오픈 프로그램인 선데이 피스트Sunday Feast가 있다고 하니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아직도 12년 전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의 시골길을 따라 강을 건너 농장 입구로 들어가, 가파른 오르막길 꼭대기에 이르니 사원이 있었다. 시골 동네인데도 특이하고 별난 사람들이 많았다. 인도 스타일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주류였는데, 백인들이 사리(천을 상, 하체에 휘감아 입는 인도 전통 여성복)와 도티(천을 하체에 감아 입는 인도 전통 남성복)를 입은 모습은 이국스러움의 극치였다. 종교적인 복식과 팔다리 이곳저곳에 새겨진 커다란 타투도 매우 대조적이었다. 여기서는 드레드락 히피가 평범해 보일 정도였다. 인도 전통 음악이 라이브로 연주되고 있었는데 청중도 같이 따라 부르는 형태의 만트라(주문) 음악이라고 했다. 몇 번 따라 부르다 보니 어느새 식사 시간이 되었다.


선데이 피스트. 출처: New Govardhana 페이스북

식사는 쌀밥, 달 (콩 수프), 카레, 튀김, 소스, 음료, 디저트가 포함된 인도 전통의 풀 코스 요리였다. 디저트로 나온 ‘할라바’라고 하는 세몰리나 푸딩이 하이라이트였다. 파스타의 원재료인 세몰리나 곡물과 버터, 대추야자(혹은 과일), 설탕이 주 재료인데, 태어나서 이런 맛은 처음이었다. 마치 따뜻한 아이스크림이랄까?

할라바에 한창 감동하면서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감상했다. 사원 앞 잔디밭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가운데 사리를 입은 백인 여성들의 천 자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정원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고 배부른 사람들의 수다 소리에 만족감과 편안함이 묻어났다. 인도 음악이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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