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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란 Jun 03. 2024

시작하자마자 끝나버린 여행 (3)

그렇게 나도 서서히 하레 크리슈나 농장의 장기 체류자가 되어갔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보다 책을 읽는 시간이 길어졌다. 주로 크리슈나 철학 입문자들을 위한 작은 책자들을 읽었는데 환생, 자연, 사회문제, 영성, 종교, 우주, 채식 등 주제별로 잘 정리되어 있어 한 권씩 성취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 책들에서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질문들의 대답을 얻었고, 읽을수록 점점 설득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디보티(수행자)는 되고 싶지 않았기에 이들의 철학에서 틀린 점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탐독을 이어갔다.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지만 가장 큰 화두는 “나는 누구인가?”였다. 나는 하필이면 왜 이렇게 생겨서, 한국이라는 국적을 가지고, 여자의 몸으로, 이런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났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 세상에 오게 된 목적을 알고 싶었다. 그러다 ⟪자아 인식의 과학(Science of Self-realisation)⟫이라는 책이 마치 오랫동안 주인을 기다린 듯이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보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알게 해 준다고? 제목만 보았을 때는 딱 나를 위한 책인 것 같았다. 책을 꺼내어 표지를 보니 심장이 더 두근거렸다. 우주를 바탕으로 팔 네 개 달린 힌두 신이 원자 모형 안에서 빛을 발하며 오묘한 자태로 서 있었다. 영성과 과학이 만난다는 게 이런 모습일까? 



⟪자아 인식의 과학(Science of Self-realisation)⟫ 책 표지.  개정판은 표지가 바뀌었다. 현재 한국어 번역을 마치고 출간을 기다리는 중.


그리하여 책에 점점 빠져들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거나 사랑을 받고자 하면 좌절되는 경우가 많은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 서로의 욕구를 완전하게 채워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랑이 단순히 신을 향하게 되면 저절로 모든 사람, 모든 생명체를 향한 사랑이 자동적으로 포함된다. 모든 생명체가 내면에 신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그동안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고 실망했던 숱한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또한 전쟁, 기아, 환경오염 등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이 사실은 영성의 부족으로 비롯된 것이며, 단순히 영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은 다소 혁명적이었지만 일리가 있었다. 


하레 크리슈나의 철학은 좋았지만 술, 담배, 커피, 육식, 혼외 성관계를 금지하는 규율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책에 빠져드는 게 점점 두려워졌다. 이 책을 읽으면 앞으로의 삶이 이전과 같지 않을 거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듯하다. 내가 오랫동안 즐거움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단번에 끊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크리슈나 농장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혹시 심심할까 봐 읽던 책은 가져갔다.


히치 하이킹하여 도착한 곳은 농장과 멀지 않은 바닷가 근처에 히피 성향이 짙은 바이런 베이라는 도시였다. 미리 물색한 공짜로 머물 수 있는 텐트촌에 짐을 풀고 그동안 끊었던 술을 보란 듯이 마시며 실컷 놀았다. 출근과 학업 걱정 없이 여행하던 젊은이들끼리 모였으니 매일매일이 파티였다. 어린 시절 친구처럼 어떤 이해관계도 얽혀있지 않았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하루가 가장 즐겁게 느껴졌던 날, 마음 한 켠에서는 동시에 슬픔이 느껴졌다. 지금은 이 젊음을 누리며 즐기고 있지만 이런 종류의 즐거움을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누릴 수 있을까? 지금은 나를 좋아해 주는 친구들이 내가 나이 들고 모습이 변해도 여전히 좋아해 줄까? 


그리하여 책을 다시 집어 들었고, 이전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마지막 책장을 넘겼을 때 모든 질문이 해소되었고, 아무런 의심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나왔다. 그동안 찾아 헤맸던 것을 드디어 찾았기 때문에 기뻤지만, 동시에 이렇게 여행이 끝나버린 것이 허무했다. 이제 다음 목적지는 자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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