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방문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 망설일 필요 없이 바로 하레 크리슈나 농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초록 평원에 소들이 풀을 뜯고 호수에 새들이 모여드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산기슭에 위치해 경사가 매우 높았는데 언덕 꼭대기에 사원이 있었고 강이 흐르는 입구 가까이에 여행자 숙소가 있었다. 경건한 느낌의 사원과는 달리 여행자 숙소는 자유 분방한 분위기였다.
하루 4~5시간의 정해진 봉사 시간이 끝나면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날이 더운 날은 일이 끝나자마자 강에 수영하러 갔다. 근처 타운이나 관광지에 놀러 가기도 했는데 나도 처음에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나중에는 숙소 라운지에 있는 책들을 읽는 시간이 길어졌다.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밤에 누군가가 모닥불을 피우면 하나둘씩 모여 불멍을 때렸다. 기타나 우쿨렐레, 특히 젬베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으면 댄스파티가 됐다. 가끔 독일 얘들이 마시맬로를 막대에 꽂아 구워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드레드락 땋기, 팔찌 만들기, 악기 연주 같은 기술이 있는 사람들은 서로 재능을 교환했다. 나도 친구들 얼굴을 그려서 선물로 주곤 했는데 취미로 가끔 그리는 정도의 솜씨라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데도 다들 좋아해 줘서 뿌듯했다.
하루가 다르게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늘 도움이 필요하기에 조금 도와주면 바로 친구가 되었다. 특정 국적의 사람들이 많아지는 시기가 있었는데 그 나라 경제 상황의 영향을 받는 듯했다. 이탈리아에 취업난이 있었을 때는 이탈리아 촌이 생겼고, 같은 이유로 독일 촌이 형성되기도 했다.
실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일단 의식주가 해결되니 마음이 너무 편했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니 여행을 하지 않아도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취업, 결혼 걱정 없이 자아 탐구와 세상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기 거주자들이 많았다. 보통 1년짜리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한 곳에 한 달 이상을 머물지 않는데 이곳에는 세 달 혹은 일 년 이상을 머문 사람도 있었다. 나 또한 2주를 계획하고 왔는데 아쉬람(수행촌) 생활을 포함해 무려 7년을 머물렀다.
여행자 숙소 서가에는 흥미로운 책들이 많이 꽂혀 있었다. 여행자들이 놓고 갔거나 농장 거주민들이 기증한 책들로 요가, 채식, 환경, 철학책 등이 있었고 대부분 영적 주제에 관한 책이었다. 처음 집어든 것은 ⟪크리슈나로 가는 길 (on the way to Krishna)⟫, ⟪비할 수 없는 선물 (matchless gift)⟫, ⟪가장 높은 단계의 요가-크리슈나 의식(Krishna Consiousness-the Topmost Yoga System)⟫ 등 크리슈나 의식을 소개하는 얇은 책자들이었다. 디보티들이 왜 매주 수백 명의 사람에게 공짜로 밥을 주는지, 왜 그런 옷을 입는지, 젊고 멋진 사람도 많은데 왜 자처해서 산속으로 들어가 이런 수행 생활을 하는지 궁금했다.
책에서는 환경오염, 전쟁, 경제 불평등 등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사실 사람들이 신과 진정한 사랑을 잊고 사사로운 욕망과 이기심을 키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구의 평화를 위해서는 채식과 명상, 나아가 신과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럴듯했다. 이렇게만 하면 모든 전쟁과 기아 문제, 환경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데, 아닐 이유도 없었다. 이 모든 문제가 사실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개인적인 이기심이 집단적, 국가적 이기심으로 확장되어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울 뿐이지 다 똑같은 이기심이었다.
특히 당시 가지고 있었던 화두인 채식과 환경 문제를 영성과 연결한 게 흥미로웠다. 이기심이 다른 생명과 자연에게 향하면 환경오염과 무분별한 착취로 자원 고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니 해결법 또한 이기심을 정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왜 이기심이 생기는 건지 궁금할 법 한데, 책에서는 신을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기심의 반대말은 사랑이고 진정한 사랑은 신에게 향할 때 가능하며, 이게 이루어지면 모든 존재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모든 존재가 내면에 신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애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등 온 생명을 향한 사랑도 강조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다음 읽은 것은 환생에 관한 책 ⟪커밍 백coming back⟫이었다. 인간은 동식물을 포함한 8,400,000여 종의 생명체의 환생을 거쳐 얻게 된 귀한 형태의 삶이라는 말은 학교에서 배웠던 다윈의 진화론과 매우 달랐다. 당시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 이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재 한 일이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는 말도 수긍이 갔다.
식사 시간이 되면 가파른 언덕을 올라 사원에서 수행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수행자들을 ‘디보티devotee(신에게 헌신하는 사람)’라고 불렀고, 어쩌다 옆에 앉게 되어 책에서 읽은 내용을 직접 물어보면 기다렸다는 듯이 열성적으로 대답해 주었다. 언덕 꼭대기의 아쉬람(수행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디보티들은 채식을 하는데, 오신채(파, 양파, 마늘 등) 뿐만 아니라 버섯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오신채는 마음에 바람직하지 않은 욕망을 일으키고, 버섯은 어두운 곳에서 자라기에 무지를 키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혼 외 성관계를 하지 않고, 차•커피 등 카페인이 들어간 것을 섭취하지 않으며 술•담배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그럼 무슨 재미로 살라는 거지? 그래서 한창 즐길 어린 나이에 디보티가 된 사람들을 보면 사연이 매우 궁금해졌다. 디보티들의 철학에 호감이 갔고 그들이 하는 일을 존경했지만 그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