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원치 않는다. 삶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이 기본적인 욕구에 근거한다. 내가 영적인 수행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지속적이고 진정한 행복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적인 수행을 시작하기 직전에 나는 물질적으로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영혼의 동반자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깊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었고, 가장 건강했으며, 좋아하는 사람들과 하고 싶은 것들을 실컷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어느 날 가장 즐거웠던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 시간이 그대로 멈추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러지 않을 거란 사실이 행복의 크기만큼 크게 다가왔다. 내가 누리는 행복이 사실은 내 젊음과 건강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허무했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10년 후, 20년 후, 내가 나이 들고 병이 들어도 여전히 나를 좋아해 줄지 자신이 없었다. 내가 바랐던 행복이 동시에 나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처한 환경, 상황, 건강, 몸, 인간관계 등에 의존하지 않는 내면의 행복, 진정한 행복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베다에서는 물질계의 특징을 일시성과 양면성으로 설명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일시적이다. 모든 것이 썩어 문들어지거나, 사라지거나, 잊히거나,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다. 물질로부터 오는 행복도 마찬가지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기쁨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그 음식을 매 끼, 매일 먹을 수 있다고 해도 곧 질리게 될 것이다. 꿈에 바라던 차를 사는 경우는? 일주일에서 한 달, 길어도 일 년이 지나면 다시 새로운 차를 눈여겨보게 될 것이다. 세계 정상의 한 댄서가 이런 말을 했다. 수년간 준비한 세계 대회에서 드디어 우승했는데 그 행복이 딱 일주일 갔다고 한다. 이처럼 이 세계에서의 행복과 불행은 영원하지 않다. 내 업보에 따라오고 갈 뿐이다.
또한 이 물질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좋고 나쁨,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등 양면성이 존재한다. 배고픔을 겪어 보아야 배가 부르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듯이, 이 세계는 필연적으로 행복과 함께 불행과 슬픔 또한 겪어야 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기대를 버리는 게 좋다. 이는 사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문제 해결이 몰두하기보다는 어느 정도까지는 이게 물질계의 천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내려놓는 것이 좋다.
해결책은 이 세상을 이상적인 곳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실 불가능하다. 가능하다 하더라도 결국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병, 노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여기까지 읽으면 지나치게 염세적으로 들리겠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영적인 수행을 통해 이 양면성과 불완전함으로 가득한 물질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 방법이 박티 요가bhakti yoga라고 하는 영적 수행이다.
박티 요가의 목적이 이 세계에서 행복을 누리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내 자신과 누구인지 깨닫고 이 세계를 벗어나 내가 진정으로 속한 고향인 영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행복이 부산물로 따라온다. 인생에 진정한 목적이 생기면서 확신과 해방감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식과 과정을 타인에게도 나누면서 사랑과 인류애를 키우게 된다. 이것이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