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지구가 겪고 있는 환경오염은 매우 암울한 수준이다. 환경오염의 원인으로 산림 파괴, 도시화, 대량 생산과 소비, 플라스틱 쓰레기, 방사능 등이 거론되는데, 이 모든 것들의 근본 원인은 개인과 집단의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가족애와 애향심, 애국심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드러나기도 한다. 내 가족, 내가 속한 집단, 나라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그럴듯한 이타주의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기심의 크기가 확장된 것일 뿐이다. 개인과 집단이 이기심을 추구하면서 타 생명의 터전과 권리를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기에 환경 문제가 생긴다.
제주도에서 살고 있었을 때 강정마을에서 해군 기지 설립을 반대하는 투쟁을 목격했었다. 당시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생명평화 단체가 내려와 텐트를 치고 시위를 했다. 한 시위자가 포클레인 앞에 드러누웠는데 공사는 아랑곳하지 않게 계속되었다. 나는 심한 무력감을 느꼈다. 한 개인이 저렇게나 처절하게 노력하는데 거대 권력 앞에서는 개미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시위를 하거나, 정책을 바꾸거나, 불매 운동을 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겠지만 사람들의 마음 안에 이기심이 남아있는 한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쏟아붓는 노력에 비해 결과도 미미하다. 물질적인 문제는 물질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 문제가 생겨난 근본 원인인 이기적인 욕망이 정화되지 않는 한 또 다른 문제를 낳을 뿐이다.
이기심의 또 다른 표출은 종차별이다. 인간이 아닌 타 생명에 대한 존중이 배제된 인류애 또한 확장된 이기심에 불과하다. 우주의 오묘한 작동 법칙은 문제 상황을 만들어 깨달음을 주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분별한 육식에 대해 경종을 울린 대표적인 사례다.
대량의 가축물이 한꺼번에 배출하는 배설물과 가스는 자연정화의 한계를 넘어서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되었다. 가축물의 먹이를 기르기 위한 토지의 무분별한 확보로 삼림 벌채, 농약, 생물 다양성 파괴 문제도 자연스럽게 뒤따라왔다. 같은 크기의 토지로 훨씬 더 많은 인간을 먹여 살릴 수 있는데, 작물을 키워 동물에게 먹이고 그 동물을 먹는 비효율적인 경제 구조가 사회 빈곤 문제도 키웠다. 치아 구조와 소화 기관 등 인간의 신체는 사실 채식에 적합한데, 이를 거스르는 식습관이 암과 각종 질병을 키웠다.
여기서는 이미 잘 알려진 채식에 관한 이점과 육식의 해로움 보다는 채식을 해야 하는 영적인 이유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공장식 사육 시스템에서 태어난 가축은 비좁은 우리 안에서 자유를 박탈당하고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정상 수명보다 짧은 생애를 살다가 도축된다. 생애 기간과 도축되면서 겪는 엄청난 양의 스트레스, 고통, 공포는 고스란히 고기에 들어간다. 내가 섭취하는 음식이 곧 내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고기 섭취는 필연적으로 그 에너지를 내 몸 안으로 들이게 된다.
베다에 의하면 직접 타 생명을 해친 자, 이에 간접적으로 가담한 자, 그 결과물인 고기를 요리한 자 혹은 섭취한 자 모두가 카르마를 받는다. 이 논리대로라면 도축된 동물은 사실 전생에 인간으로서 타 생명에게 같은 고통을 가했기에 그런 삶을 겪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고기가 식탁에 이르기까지 연루된 모든 사람들도 같은 운명을 만들어나간다. 슈퍼마켓에 멀끔하게 포장된 고기에는 이 모든 과정이 배제되어 있기에 소비자는 알 길이 없다. 하나 무지는 변명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모르고 불을 만졌다고 해서 불에 데이는 것을 면할 수는 없다. 카르마는 한 치의 빈틈없이 공평하게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 무자비한 카르마의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은 영적인 지식과 수행이다.
영적인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받는 비난 중 하나는 세상을 위해 기여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서 명상이나 기도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명상과 기도는 개인적인 수행 이상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다.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문제가 비롯되었고, 이 욕망의 정화는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의 영적인 해결법은 내 이기심을 정화하고 타인과 영적 지식을 나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