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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책장 Apr 26. 2022

산책과 한정원

<시와 산책> 한정원 / 시간의흐름

작년 가평으로 여행을 갔을 때, 가족들의 의견은 묻지 않고( 내가 밀릴 것이기에) 책방을 검색해서 갔다. 책방 이름은 북유럽. 펜션 입실 시간과의 사이를 넉넉하게 확보했다. 책방 안에서 머무는 시간은 내가 자연스럽게 밀려서 후다닥 책을 사고 나왔다. 결국 남은 시간 펜션에 전화해서 조금 일찍 입실을 했다.  그때 선물할 책을 고르는데 책방 지기가 망설임 없이 추천해 주었다. 책방 지기의 손이 닿은 책은 따뜻함이 느껴지는 표지를 한 '시와 산책'이었다. 선물하며 나도 꼭 만나야지 했다.



시와 산책은 '시간의 흐름' 출판사의 '말들의 흐름' 시리즈이다. 열 권으로 하는 끝말잇기 놀이이다. 한 사람이 두 개의 낱말을 제시하면, 다른 사람은 앞사람의 두 번째 낱말을 이어받은 뒤, 또 다른 낱말을 새로 제시한다. 내가 늘 신선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기획이 끝이 아님이 신기하다. 단어는 그런 마법을 가졌다. 단어의 흐름에서 하나씩 건져올려 익숙한 단어로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니 말이다.  『시와 산책』 은 커피와 담배-> 담배와 영화-> 영화와 시에서 이어받은 '말들의 흐름' 네 번째 책이다.


 산책을 하며 생각한 단상들을 시와 함께 썼다. 우리는 작가가 산책한  25번의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다. 한 번 걸을 때마다 오래 머무르고 싶다. 다시 돌아가 두 번, 세 번 읊조려 본다.  겨울 새벽 동틀 무렵 문을 열고, 몸 안에 쌓인 것을 입김으로 내보내고  맑은 정신 하나 건네받은 기분이다. 마음에 고요한 잔물결이 일렁거린다.'시와 산책'은  산문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긴 시를 읽고 있는 느낌이다. 그만큼 작가의 언어가 빛났다. 그 빛남을 쓸 수 없는 내 안의 낱말의 조합이 너무 부족해서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삶에서도 내밀한 상상을 간직하는 일은 필요하다.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다.' <시와 산책>p18


'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시와 산책> p19


  친구의 아픔에 섣부르게 위로하지 않고, 함께 언 강 아래의 소리를 상상하며 겨울의 시간을 함께 보내주는 모습은 계속 찾아오는 겨울을 기꺼이 마주할 수 있게 한다. 어렸을 적 잦은  전학이 힘들었고, 강에서 이어 바다에서 사람이 죽은 기억,  동네 길 고양이를 챙기고, 동네 과일 트럭 아저씨와 길 고양이의 밥그릇을 놓을 수 있게 한 담배 아저씨와 데면데면한 곁이 우정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 고통의 지난 시간, 해마다 또는 하루 아침에 올 겨울에게 사랑을 담아 노랠 부를 것 같다. 

 

산책하며 만나는 작고 하찮은 것에 궁금해하고 마음을 읽고 돌아온 작가는 돌아올 때마다 전과는 다른 사람에 다른 사람이 되어가며 짐작할 수 없는 '나'라는 장시가 지어진다고 한다.  '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는다. 그런 다음 나의 내면이 다시금 바깥을 가만히 보는 것이다. 작고 무르지만, 일단 눈에 담고 나면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단단한 세계를'이라고 말한다. 책을 오래 보고 싶어서 건강하고 싶다. 그래서 움직이는 나의 산책에 이유에 이유를 더해주고 있다.  다른 사람에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한 한 걸음에 의식을 가져야겠다. 걸음이 닿는 작은 것들을 깊이 바라보고 싶어 당장 뛰쳐나가고 싶다. 나 보고 옷 벗고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치라는 것도 아니고 걸으면서 나와 바깥 세계를 넘나들며 궁금해하라는데 뭐 해보는 거다. 나에겐 어제와 다르게 짙어가는 잎사귀 하나 깊이 들여다보는 것도 사실 훈련이다. . 앞만 보고 수시로 만보기만 체크하며 속도를 내지 말고 가끔은 멈추고 구체적인 마음이 되고 싶다.


 작가는 소록도에  있는 한센인(나병환자) 봉사를 가서 몸을 일으킬 수 없고, 눈이 멀어 있는 할머니의 우렁찬 노래를 듣는다. 손가락이 없이 뭉툭한 손을 쓰다듬으며, 그럴 때 할머니와 나 사이에서 행복을 본다.  아름답고 두려운 서쪽을 보며 끝없이 질문하는 작가는 시 안에서 서쪽을 나 같이 서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시와 산책>으로 만난 작가는 나에게 근사한 시인이다.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들만이 발자국처럼 남기를 바란다'라는데 나에게 <시와 산책>은 '아름다운 시'로 남았다.내가 뒤이어 쓴다면 난 한정원 작가님이 너무 알고싶다.'산책과 한정원'의  제목을 붙이련다. 




한정원


태어나 성장하고 일하며 대략 열 개의 도시를 거쳤다.

사람과 공간을 여의는 것이 이력이 됐다.

대학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단편영화를 세 편 연출했고 

여러 편에서 연기를 했다. 구석의 무명인들에게 관심이 많다.

수도자로 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고,

지금은 나이 든 고양이와 조용히 살고 있다.

읽고 걷는 나날을 모아 『시와 산책』 을 썼다.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들만이 발자국처럼 남기를 바란다.

앞으로는 나를 뺀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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