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고수를 기억하는 여자

by 권성선

여자는 마흔아홉이었다. 이름은 연희.

전철 창밖으로 강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한 계절이 따라왔다. 스물여섯의 여름, 그녀는 한 남자의 등을 따라 낡은 문을 열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강수한’이었다. 지금은 모두가 그를 ‘고수’라 부르지만, 연희에게 그는 오래도록 그냥 ‘강수한’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주방 막내였다. 손은 항상 물에 절어 있었고 손등엔 작은 화상 자국들이 흩어져 있었다. “뜨겁지 않아요?”라고 묻자, 고수는 무심하게 웃었다. “뜨거우니까 맛이 나죠.” 말끝마다 미열이 묻어나는 사람. 연희는 그가 끓이는 국물 맛을 좋아했다. 특별할 것도 없는데 먹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졌다. 스물여섯, 세상은 무엇이든 가능해 보였고, 두 사람은 퇴근 길마다 한강 다리를 걸었다. 다리 밑에서 묻어오는 물풀 냄새, 불어오는 실바람, 손끝에서 전해지는 체온. 그 여름, 연희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다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생은 늘 말없이 다른 쪽으로 꺾였다.

연희의 아버지가 쓰러졌다. 먼지 쌓인 공장, 병원비, 떨리는 어머니의 손. 그 와중에 연희의 남동생이 보증을 잘못 서서 집안에 빚이 생겼다. 전화벨은 한밤에도 울렸고, 벨소리는 사나운 개처럼 집안을 물어뜯었다. 그때 수가 사라졌다.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연희는 알 수 없었다. ‘도망쳤구나.’ 마음속에 한 줄 문장이 박혔다. 그 문장은 그 후로도 오래도록 그녀의 마음 마디마다 한숨처럼 따라붙었다.

그녀는 혼자 서울을 떠났다. 작은 도시의 보험회사, 끝없이 반복되는 설득과 서명, ‘저희 상품은요’로 시작하는 하루. 생활은 나아졌지만 마음은 단단해지지 않았다. 어느 가을밤, 야근을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문득 생각했다. ‘사람 속에는 떠난 문장이 살고 있구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문장은 여전히 ‘수’의 이름을 에두르고 있었다.

그 뒤로 여러 계절이 흘렀다. 결혼도, 출산도, 이혼도 지나갔다. 삶은 자신만의 속도로 흘렀다. 가끔은 너무 느리고, 가끔은 너무 빨랐다. 그러다 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우연히 들었다. “알지? 그때 그 수한이. 지금은 ‘고수’라고 불리더라. 골목에 포차 하나 차리고, 손님들 얘기 들어준대.” 누군가는 덧붙였다. “그 사람, 사람 얘기 잘 들어. 그릇 닦는 솜씨도 여전하고.”

그날 밤, 연희는 결심했다. 가서 보자. 확인하지 않으면 문장은 영원히 떠난 채로 남을 테니까. 사라진 사람, 사라졌다고 믿었던 사람, 사실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살아 있는 사람. 그녀는 오래 미뤄둔 일을 하듯 천천히 가방을 들었다.

비가 막 그친 골목이었다. 바닥은 축축했고, 간판 글씨는 물빛으로 흔들렸다. ‘고수포차.’ 천막을 젖히자 따뜻한 김이 얼굴에 닿았다. 연희는 잠깐 숨을 고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양철 테이블들, 쇠 젓가락 소리, 사람들의 낮은 웃음. 그리고 주방 끝에서 그릇을 닦는 남자. 고수.

그는 잠시 시선을 들었다. 아주 잠깐, 그러나 확실히. 두 사람의 눈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연희는 구석 자리로 갔다. 의자를 당기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고수가 천천히 다가왔다. 손에 걸친 메뉴판 대신, 오래된 습관처럼 낮은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뭘로 드릴까요?”

“국물 먼저요. 너무 짜지 않게.” 말하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스물여섯의 여름, 늘 그렇게 주문했었다. ‘너무 짜지 않게.’ 그 말은 둘만 아는 신호처럼 작은 추억의 문을 열곤 했다.

잠시 후, 고수가 작은 냄비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올렸다. 김 위로 파 송송, 고춧가루 몇 점이 떠 있었다. 한 숟가락, 따뜻함이 혀끝을 덮고 목으로 흘렀다. 괜찮았다. 아니, 그 시절의 맛이었다. 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수 쪽을 바라보았다. 고수 역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세월이 남긴 자국이 선명했다. 손등의 화상은 더 깊어졌고, 손가락 마디는 굵어졌다. 그러나 눈빛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늘 뜨겁고, 늘 어디엔가 닿아 있는 듯한 눈.

"맛은 괜찮습니까." 고수가 말했다.

연희는 웃었다.

"너무 짜지 않네요."

그는 아주 미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배웠으니까."

"누구한테요?"

"예전에." 짧은 답.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스물여섯의 서로였다.

잠깐의 침묵. 비닐 천막을 스치는 바람 소리, 다른 테이블에서 잔 부딪히는 소리, 멀리서 울리는 오토바이 시동. 삶의 소음들이 알아서 자리를 채웠다.

연희가 먼저 말을 이었다. “수한씨가 갑자기 사라졌죠"

“당시 연희 씨 동생 일 때문에 급하게 정리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연희는 그를 똑바로 보았다. "그때 저는 도망갔다고 생각했어요."

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였을 겁니다."

"빙빙 도는 말 말고, 그냥 말해줘요. 왜 말도 없이 떠났어요?"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말들 사이에 과거가 고여 있었다.

"동생분 빚이 생각보다 컸어요. 사채업자들이 연희 씨에게까지 찾아갈 기세더군요. 그때 액수라면 제가 사는 집의 전세금으로 막을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연희 씨에게 말했더라면 분명 말렸을 거예요. 그래서 혼자 결정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시간이 없었습니다. 연희 씨 아버님 병원비는 급했고, 동생분은 이미 사채업자들한테 쫓기고 있었죠. 그래서 전세금을 빼서 빚을 정리했습니다.”

연희는 조용히 눈을 떴다. 고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덧붙였다.

“문제는 그 뒤였습니다. 사채업자들이 이번엔 연희 씨 이름을 끌어들이려 하더군요. 제게 빚을 넘겨도 끝날 일이 아니었어요. 결국 누군가는 계속 엮일 수밖에 없는 판이었죠.”

고수는 웃지 않았다. 자학도, 영웅담도 아니었다. 한 인간이 겪은 일을 그냥 내려놓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연락 안 했어요?"

"여력이 없었습니다. 집도 없어졌고, 새로 일을 찾아야 했어요. 무엇보다 연희 씨한테 이런 얘기를 해봤자, 같이 붙들릴까 봐."

"붙들리는 게 싫었어요?"

"붙들고 싶었죠." 그는 처음으로 그녀를 정면으로 봤다. "그게 더 무서웠습니다. 연희 씨가 저 때문에 더 힘들어질까 봐."

연희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국물 속 고춧가루가 작은 섬처럼 떠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그 섬들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문장이 아주 천천히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도망쳤다'에서 '지키려고 했다'로. 그 사이에는 수십 개의 계절과 수백 번의 주방 불과 몇 장의 편지와 부재와 굳은살이 있었다.

"그래서 포차를 차렸어요?"

"네."

"왜 하필 포차예요?"

"뜨겁고, 가볍고, 오래된 그릇들이 있는 곳이요. 사람들이 울 수도 웃을 수도 있는 곳."

"사람 이야기를 듣는 곳?"

"네.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뿐이라서. 그때 누군가 제 얘기를 들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곳이 없더라고요."

그는 천천히 손수건을 꺼내 그릇을 문질렀다. 그가 그릇을 닦는 손길은 의식 같았다. 닦고, 비치고, 확인하고, 다시 닦는 일. 사람의 상처를 직접 어루만질 수는 없지만, 그릇 하나는 반짝이게 만들 수 있다는 듯.

"이름을 바꾼 건요?"

"다시 시작하려고. 처음부터."

"처음은 언제부터예요?"

고수는 한참 생각하다가 답했다. "누군가 내 국물을 먹고 '너무 짜지 않다'라고 말하던 때부터요."

연희는 그 말에 천천히 웃었다. 오래 묵은 웃음이었다. "그게, 나였구나."

잠시 후, 포차 문이 열리고 바람이 들어왔다 나갔다. 손님들이 회전문처럼 앉았다 떠났다. 저마다의 사연이 테이블 위에 흘러나왔다. 연희는 자리에서 살짝 몸을 돌려 그 손길을, 그의 옆얼굴을 더 오래 바라보았다. 도망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버틴 사람의 얼굴이었다. 떠난 문장이 아니라 돌아온 문장. 그녀는 마음속에서 그 문장을 조용히 고쳐 썼다.

"수." 그녀는 아주 낮게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고수." 그녀는 이름을 바꿔 불렀다. "고수 씨."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네."

"그땐 몰랐어요. 당신이 어떤 걸 지키려고 하는지."

"그땐 저도 몰랐습니다. 제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지는 것보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더 크고 선명한 밤이었다.

연희는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국물값이요."

고수가 고개를 저었다. "옛사람은 그릇 닦기로 계산하는 걸로."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릇 하나만 닦아주고 가세요. 여기서는 그게 제일 큰 예의거든요."

그는 깨끗한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연희는 행주를 받아 들고 조심스레 표면을 문질렀다. 미세한 물자국이 지워지고, 둥근 빛이 올라왔다. 닦이는 건 그릇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도 함께 매끈해지는 기분이었다.

"괜찮네요."

"네.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말을 했고, 조금 다른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가 일어나 천막을 젖히자, 골목의 공기가 바뀌어 있었다. 비는 완전히 그쳤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네온이 길게 늘어졌다. 돌아서기 전에 그녀는 한 번 고수를 바라보았다. 고수는 다시 그릇을 닦고 있었다. 말 없는 의식. 이곳에서 그는 매일같이 그 일을 반복할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 끝마다, 그릇 하나를 반짝이게 만들 것이다.

연희는 천천히 골목을 걸었다. 오래 붙들고 있던 문장이 이제는 그녀를 붙들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또렷한 문장이 새로 떠올랐다. '우리는 서로의 과거를 설명할 수 없지만, 오늘의 국물로 서로를 알아갈 수 있다.'

그녀는 혼잣말로 말했다. "너무 짜지 않네." 그리고 웃었다.

고수는 마지막 그릇을 높이 들어 빛을 확인했다. 맑았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의 과거가 오늘에서야 제 자리를 찾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리고, 다음 손님의 자리에 깨끗한 그릇을 내려놓았다. 내일도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손은 여전히 따뜻했고 그릇은 다시 반짝였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28화28화. 첫 소설을 출간한 택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