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은 늘 장마철처럼 눅눅했다.
어머니는 식당에서 늦게까지 일했고, 아버지는 술에 젖어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소년이던 그는 가끔 가게 문을 닫으며 혼자 어른이 되어야 했고 밤마다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세며 잠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소리는 빈 병끼리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나면 집 안 공기까지 술 냄새로 바뀌었다.
그때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술은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유 없는 술은 사람을 무너뜨리고 이유 있는 술은 사람을 버티게 한다.”
그 다짐은 훗날 그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스무살, 국밥집 주방 막내로 들어간 그는 하루 종일 설거지통에 손을 담갔다.
뜨거운 물에 불어터진 손, 손등에 남은 작은 화상들. 그러나 그릇이 반짝일 때마다 그는 묘한 위안을 느꼈다.
“그릇이 맑아야 국물이 맑지.”
그 말은 음식의 법칙이자 훗날 그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되었다.
스물여섯의 여름, 그는 사랑에 빠졌다.
한강 다리 위에서 불어오던 바람, 손등이 스칠 때마다 가벼워지던 하루.
그녀는 국물이 덜 짜다며 웃었고, 그는 그 웃음을 오래 끓였다.
“덜 짜게, 덜 세게.” 그가 자기 삶에 붙인 작은 표어였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이 흔들렸을 때 그는 생각했다.
“내가 대신 맞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서둘러 끼어든 일은 그의 손보다 깊은 곳을 태웠다.
사채는 불처럼 번졌고, 그가 퍼올린 물은 늘 한 국자 모자랐다.
결국 그는 전세금을 빼 빚을 막았다. 그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는 늦게 닿거나 아예 닿지 않았다.
불은 꺼졌지만 연기는 오래 남았다.
그 후 그는 더 큰 주방을 전전했다. 국을 휘저으며 불의 눈을 보며 사람들의 소리로 시간을 쟀다.
누군가는 사랑이 깨져 와서 울었고, 누군가는 직장을 잃고 와서 술을 찾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꽉 채우지 않았다. 가득 채우면 급히 마셨고 조금 덜 채우면 한 모금이 다음 말을 천천히 데려왔다.
“잔은 꽉 채우는 게 아니고 마음은 비우는 게 아닌가 보네.”
그는 그렇게 배웠다. 잔을 따를 때마다 상대의 숨을 헤아렸다.
가게를 차릴 즈음 사람들은 그를 ‘고수’라 불렀다.
누가 붙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이름은 그의 등을 조금 더 곧게 세워주었다.
‘고수포차’라는 간판을 걸며 그는 약속했다.
“나는 술을 따를 때 이야기를 따른다. 잔의 높이가 말의 깊이를 좌우하지 않게. 그러나 말이 잔을 비켜가지 않게.”
저녁이 되면 그는 먼저 그릇을 닦았다. 닦고, 비추고, 균열을 확인하고, 다시 닦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밤을 들고 와 앉았고, 그는 듣는 일을 했다.
어떤 밤은 지나치게 무겁고 어떤 밤은 너무 가벼웠다. 그는 그 둘을 섞어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그는 불과 물 사이에 그릇을 놓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의 그녀가 다시 왔다.
그녀는 “너무 짜지 않네요”라며 국을 떠먹었고 그는 웃지 못한 웃음을 지었다.
그날 밤, 불을 끄고도 한참 동안 그릇을 닦았다.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손에 남은 화상 같은 것임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날 이후 그는 생각했다.
이제는 자신에게도 잔을 한 번 따라야겠다고.
늘 듣기만 하느라 남겨둔 말들, 닳아 없어질 줄 알았으나 오히려 더 단단해진 말들.
그것을 꺼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비가 그친 밤, 골목의 냄새가 단단했다.
젖은 시멘트, 튀김 기름, 낯선 향수, 꺼져가는 담배.
천막 위 고인 물방울들이 포차의 불빛을 흩뿌렸다.
문 닫을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한 테이블에 택시기사 한 명이 남아 있었다.
길 위의 피로가 어깨선에 걸린 얼굴이었다.
“사장님” 손님이 잔을 비우며 말했다.
“왜요?”
“사장님 얘기도 좀 해요. 맨날 남 얘기만 듣지 말고.”
고수는 병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오늘은 내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그는 긴 숨을 들이켰다. 술 대신 말을 빈 잔에 붓는 사람처럼.
“나는 잔을 채우는 대신 잔을 봅니다. 얼마나 비었는지, 얼마나 흔들리는지를요. 왜냐하면 사람이 말하려고 할때 잔이 먼저 떨려요. 그때 병을 들어 한 모금 아니 반 모금만 따릅니다. 사람이 서둘러 마시지 않게 한 모금에 한 문장만 꺼낼 수 있게.”
그는 병을 들어 손님의 잔을 삼분의 일쯤 채웠다.
“잔을 끝까지 채우지 않는 이유요?” 손님이 물었다.
“잔을 가득 채우면 결국 급히 비우게 돼요. 그런 사람은 이상하게도 말은 끝까지 이어가지 못하더군요"
고수는 다시 그릇을 닦으며 말을 골랐다.
“젊을 때, 나는 남의 불을 끄려다 내 불을 태웠습니다. 누군가의 빚, 누군가의 병. 대신 맞아주면 끝날 거라 믿었죠. 바보 같다고 해도 좋아요. 그땐 그게 사랑이고 의리인 줄 알았으니까. 불은 꺼졌지만 남은 건 타버린 내 냄새였습니다. 그 냄새가 싫어 더 열심히 닦았어요. 그릇을. 사람을. 밤을.”
손님이 조용히 웃었다.
“그래서 사장님은 늘 그릇을 닦는군요.”
“네. 닦을 수 있는 건 그릇뿐이니까요. 사람은 닦는다고 맑아지지 않습니다. 다만 반짝이는 걸 곁에 두면 잠깐 자기 얼굴을 비춰보게 되죠. 그 순간만큼은 맑아집니다.”
고수는 자기 앞에 잔을 하나 꺼냈다.
그 동안 늘 비워두었던 자리. 그는 병을 들었다가 멈추고 천천히 말했다.
“내 잔에도 한 번은 따라야겠네요.”
그는 정말로 자기 잔에 술을 부었다. 가득이 아니라, 삼분의 일.
“나는 빈 잔으로 살아왔어요. 비워야 편했거든요. 채우면 흘러서 냄새가 나고, 냄새가 나면 누군가 떠납니다. 나는 오래도록 떠나는 사람을 봤습니다. 그래서 비워두었죠. 대신 남의 잔을 채웠습니다. 남의 잔을 채우면 그 사이 나는 존재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알았어요. 남의 잔만 채우다 보면 내 이야기는 바닥에 남는다는 걸.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으로. 그래서 오늘은 내 이야기를 잔에 따릅니다. 억울함, 미안함, 놓쳐버린 말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까지. 넘치면 안 되니 조금씩만.”
그는 한 모금 마셨다.
술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적당했다.
“사람은 잔으로 말합니다. 어떤 잔을 쓰는지, 얼마나 남겨두는지, 누구의 잔에 먼저 따르는지. 나는 잔을 돌리는 순서를 고민합니다. 상처가 깊은 사람에게 먼저 가장 많이 웃는 사람은 제일 나중에. 술을 따른다는 건 결국 사람의 시간을 나누는 일입니다.”
손님이 조용히 물었다.
“그럼 사장님 상처는 누가 적셔줍니까.”
고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술병을 들어 손님의 잔에 살짝 기울였다.
“오늘은 당신이요.”
손님은 웃으며 병을 받아 고수의 잔에 술을 부었다. 넘치지 않게 그러나 비지도 않게.
잔 밑을 받친 손끝이 떨림 없이 안정적이었다.
고수는 그 소리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병에서 잔으로 떨어지는 맑은 소리.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위해 따라준 술.
“고맙습니다.”
“뭘요.”
“내 잔을 채워줘서요.”
포차의 공기가 달라졌다.
천막 밖, 골목의 물기가 서서히 말라갔다.
밤의 기척이 뒷걸음쳤다. 새벽이었다.
그는 마지막 손님의 자리를 치우며 혼잣말했다.
“나는 계속 술을 따를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비어 있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비우고 싶은 사람에게도. 넘친 사람에겐 조금 덜, 모자란 말에겐 한 모금 더. 그리고 가끔은 내 잔에도.”
문을 닫기 전 그는 그릇 닦기 세레모니를 했다.
닦고, 또 닦았다. 그릇 위로 새벽빛이 얇게 내려앉았다.
가게 안쪽 선반에는 두 개의 잔이 나란히 올려져 있었다.
하나는 늘 손님을 위해 또 하나는 오늘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두 잔은 비어 있었지만 비어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의 말과 내일의 말이 들어올 자리를 남겨둔 채, 반짝거렸다.
그는 속삭였다.
“나는 내 이야기를 따른다. 그래야 내일 누군가의 이야기도 더 잘 따를 수 있으니까.”
불을 끄고 천막을 내렸다.
새벽 공기가 그의 폐를 가볍게 채웠다.
어제와 같은 골목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아직 어둠이 남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잔을 올리듯 긴 숨을 내쉬었다.
오늘의 마지막 한 모금은 스스로를 위해 남겨두고,
내일은 다시 누군가의 이야기를 따르기 위해.
그는 술을 따르지만, 진짜로 따른 것은 사람의 말이었다.
혹시 누군가 오늘 비워낸 말이 있다면 언젠가 이곳에서 따뜻하게 다시 채워지길.
고수포차는 늘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고수포차〉 시즌1은 여기까지입니다.
고수의 잔에 담긴 이야기를 함께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워낸 잔처럼 잠시 쉬어가며, 또 다른 밤과 사람들의 사연을 준비하겠습니다.
시즌2에서는 새로운 손님들, 새로운 이야기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도 이 자리에서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