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야근 후 지하철 끊긴 직장인

by 권성선

야근 후 지하철 끊긴 직장인

그날도 어김없이 그는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밤 열 시를 훌쩍 넘긴 시간, 사무실은 점점 비어갔다. 형광등 불빛은 여전히 희뿌옇게 켜 있었지만, 자리에 앉아 있는 이는 이제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얹은 그뿐이었다.

팀장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그에게 슬쩍 다가와 서류를 내려놓았다.

“오늘만 조금 더 하고 가자. 내일 오전 회의 전에 이거 정리돼야 해.”

익숙한 말투였다. 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수십 번 ‘오늘만’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오늘만은 내일도 이어지고, 그 내일은 또 다른 오늘로 반복될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거절할 수 없었다.

식어버린 커피를 비우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지만, 눈은 모래알처럼 따갑게 시렸다. 화면에 수십 번 고쳐 쓴 문장이 깜박거렸다. 하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키보드 위를 떠나지 못했다.

서류철을 덮고 시계를 올려다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막차 시간이 이미 지나 있었다. 텅 빈 승강장에서 들려오는 ‘오늘 운행을 종료합니다’라는 방송이 귓가에 환청처럼 울렸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쥔 채 한숨을 토해냈다. 오늘도 집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단순한 피곤보다 훨씬 무겁게 어깨를 눌렀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 두 통과 짧은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아빠 언제 와?’

간단한 다섯 글자였지만 그 무게는 보고서 더미보다 훨씬 컸다. 손가락이 답장 창에 머물렀다. ‘곧 간다’고 쓰고 싶었지만 그 말이 거짓말이 될 게 뻔했다. 그는 결국 화면을 꺼버리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옷 차림으로 현관 앞에 앉아 졸린 눈으로 기다리던 모습. 그때마다 아내는 “들어와서 씻고 얼른 자라”라고 달래곤 했지만, 아이는 기어이 “아빠 온다 했잖아”라며 눈을 비볐다.

그는 점점 더 자신이 아버지로서의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회사에서는 성실한 직원이어야 했고, 집에서는 늘 미안한 가장으로 남아야 했다. 양쪽 어디에서도 ‘진짜 나’는 없었다.

사무실 불을 끄고 거리로 나섰다. 도시의 밤은 이미 적막 속에 잠겨 있었고, 가로등 불빛만 차갑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도로는 한산했고 간간이 달리는 택시 불빛이 긴 궤적을 남겼다.

편의점 앞에서는 귀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컵라면을 들고 서 있었고, 대리기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는 그 무리 속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택시들을 바라보았다. 손만 들면 금세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들지 않았다.

택시비는 한 번에 몇 만 원씩 나갔다. 일주일에 서너 번 이런 밤이 반복되면 한 달로 치면 가계부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아이 학원비, 대출 이자, 장보기 비용을 생각하면 선뜻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지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택시를 타고 서둘러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깊이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게 두려웠다. 혹은 거실 소파에서 졸다 깜빡 잠든 아내를 깨워야 할까 봐,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게 더 버거웠다. 택시를 타면 몸은 빨리 도착하지만 더 빨리 마주해야 하는 건 가족 앞에서의 미안함이었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마음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오늘도 집에 못 가는 아빠’라는 자책이 깊게 파고들었다. 그렇게 걷던 중 낡은 간판 불빛이 들어왔다. ‘고수포차’.

낡고 빛바랜 간판이었지만 어쩐지 그 불빛은 따뜻해 보였다. 집에는 못 가더라도, 마음만큼은 잠시 기댈 수 있지 않을까. 발걸음은 저절로 그곳을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따끈한 국물 냄새가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쪽에서는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났고, 작은 TV에서는 야구 하이라이트가 재생되고 있었다.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김치찌개의 김, 양은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라면 국물, 그 사이사이로 튀어나오는 웃음소리와 한숨.

그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뒷자리에선 젊은 남녀가 연신 서로의 잔을 채워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맞은편에는 퇴근 후 유니폼 차림 그대로 온 택배기사 셋이 소주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가 자기만의 짐을 내려놓는 얼굴들이었다.

“오늘도 늦으셨네요.”

고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늘 그렇듯 따뜻하지만, 상대의 고단함을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이 채워지고 술이 한 모금 들어가자 굳게 닫혀 있던 말문이 열렸다.

“아이가 물어보더라고요. 아빠 언제 오냐고… 그런데, 대답을 못하겠더라고요.”

그 순간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중년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나도 그래요. 애가 중학생인데 어느 날은 내 얼굴보다 엄마 얼굴만 더 찾더라고. 나는 늘 늦으니까. 그래서인지 이제는 묻지도 않아요. 그냥 포기한 거죠.”

그 말은 낯선 이의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그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이가 더는 묻지 않는 날이 오면 그때는 정말 끝일 것 같았다.

사내는 웃으며 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웃음 끝에는 눈물이 맺힌 듯 떨림이 있었다.

“근데 또 가끔은 그래요. 잊은 줄 알았던 애가, 엉뚱한 순간에 불쑥 묻습니다. ‘아빠, 오늘은 집에 와?’하고. 그 한마디에 그냥 가슴이 철렁해요. 아이들이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주더라고요. 포기한 것 같아도요.”

그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저릿하게 울렸다. 어쩌면 지금도 집에서 아이는 여전히 묻고 있을지 모른다,

그때 고수가 따끈한 국물 한 사발을 그의 앞에 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괜찮아요.” 고수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늦어도 결국 집에 돌아가면 아빠잖아요. 아이는 그걸 압니다. 대답 못한 게 죄가 아니에요. 오히려 대답할 수 없는 마음이 아빠라는 증거 아닐까요.”

그는 숟가락을 들고 한참 동안 국물만 바라보다가 조용히 떠 넣었다. 뜨거움이 혀를 타고 내려가자 오늘 하루의 피로가 조금은 녹아내렸다.

고수는 잠시 그의 얼굴을 살피더니,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사람 마음은 다 그래요. 회사에선 성실한 직원이어야 하고, 집에서는 좋은 아빠여야 하죠. 하지만 가끔은 그냥 ‘나’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포차가 그런 곳이에요. 여기서는 다들 직함도 무게도 내려놓습니다.”

고수의 말은 술보다 깊게 스며들었다. 마치 오래된 책 속 구절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옆자리 사내가 잔을 들며 웃었다.

“형님, 우리 내일은 집에 일찍 갑시다. 적어도 하루는 애 얼굴 보고 자야죠.”

그도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약속 같은 힘이 담겨 있었다.

포차를 나서니 바람이 차갑게 스쳤다. 새벽 공기는 오히려 맑았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인적 드문 거리는 고요했다. 술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발걸음은 전보다 한결 가벼웠다.

그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은 여전히 꺼져 있었지만 그 안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빠 언제 와?’

이번에는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확한 시간이 아니라도, 미소로라도.

멀어져 가는 포차의 불빛은 등 뒤에서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불빛이 아니었다. 그가 무너지지 않고 내일을 향해 걸을 수 있게 하는 작은 등불, 삶의 숨구멍 같은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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