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20년 만에 만난 첫사랑

by 권성선


그녀의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가득했다. 겨울이면 방 안에서 입김이 흘러나왔고, 석유난로 불은 금세 식었다. 담요를 여러 겹 덮어도 발끝이 시려 밤마다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여름이면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벽지를 타고 옷장 안까지 번졌다. 흰 블라우스에는 얼룩이 남아 지워지지 않았고, 친구들의 눈길을 피해 옷깃을 꼭 여몄다.

수학여행비를 가장 늦게 냈던 기억이 마음에 남았다. 교사가 명단을 확인하며 “아직 안 낸 사람”이라 말할 때 그녀의 심장은 크게 뛰었다. 친구들이 새 운동화와 가방을 자랑할 때, 그녀는 낡은 운동화를 솔로 문질러 닦아내며 웃는 척해야 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속으로는 단단히 다짐했다. “나는 반드시 가난을 벗어나야 한다. 사랑 같은 건 사치일 뿐이다.”

대학 시절, 그녀에게 다가온 남자가 있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마음은 넉넉했다. 늘 그녀 곁에서 웃어주던 사람이었다. 수업 끝나고 늦은 시간 도서관에서 컵라면 하나를 나눠 먹었고, 비 오는 날이면 자신의 우산을 그녀 쪽으로 기울여 어깨가 흠뻑 젖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분식집에서 함께 먹던 떡볶이는 언제나 뜨거웠다. 그의 곁에 있으면 웃을 수 있었지만 웃음만으로는 내일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마음이 따뜻해도 현실은 차갑게 그녀를 끌어내렸다.

그녀는 결국 그의 손을 놓았다. 대신 부유한 집안의 남자를 선택했다.

연애 시절의 그는 세심했고 다정했다. 약속마다 작은 선물을 준비했고 차로 그녀를 데리러 와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부모가 가진 돈이 있었고, 물려받을 사업체가 준비된 남자였다. 그녀는 이제 행복할 차례라고 믿었다. 이제는 더 이상 움츠리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결혼식이 끝나자 삶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첫 명절, 그녀는 밤새 전을 부쳤다. 손끝에 화상 자국이 남을 만큼 부쳤지만 시어머니의 말은 한결같았다.

“모양이 왜 이러니? 이것도 전이라고 부친 거니?”

아이 돌잔치 날에도 불만은 이어졌다. 아기의 옷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고, 사진 촬영 자리에서 웃지 않는다고 나무랐다. 그녀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지켜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남편은 늘 같은 말만 했다.

“어머니도 시간이 필요하실 거야. 조금만 참아.”

그는 마마보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누구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 끝내 누구도 지켜내지 못했다. 명절 귀향길, 운전대를 잡은 그는 라디오 볼륨만 높였다. 뒷자리에서 시어머니의 시선에 눈물이 차올라도 그는 모른 척했다.

첫아이가 태어나고 갈등은 더 깊어졌다. 이유식을 만드는 방식, 아이의 옷, 잠재우는 방법까지 시어머니의 간섭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매번 홀로 맞섰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지쳐갔다. 거울 속에는 웃음을 잃은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결국 그녀는 이혼을 결심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속물이라 말했지만, 그 대가를 치른 건 그녀였다. 가난을 피하려 했던 선택이 호랑이 굴로 이어졌음을 그녀는 온몸으로 배웠다.

그래서일까. 힘들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얼굴, 첫사랑. 버렸으나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었다.

스무 해 만의 동창회. 식당 안은 소란스러웠다. 술잔이 오가며 웃음소리가 터졌고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웠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지만, 시선은 자꾸만 저편으로 향했다.

그가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흰빛이 섞였고 주름도 늘었지만 웃을 때 번지는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다. 순간 시간은 거꾸로 흘러간 듯했다.

술이 몇 차례 돌았을 무렵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자리를 일어섰다. 탁한 공기를 벗어나 밤거리로 나오자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잠시 말이 없었다.

“좀 더 얘기할래?”

그의 제안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길모퉁이 포장마차였다. 빨간 비닐 천막은 바람에 흔들렸고, 연탄불 위에서 어묵탕이 끓으며 김이 피어올랐다. 뜨거운 국물 냄새와 소주 냄새가 뒤섞여 공기를 가득 채웠다. 옆자리에서는 직장인들이 소리 높여 건배를 외쳤고, 천막 바깥에서는 바람이 천막을 펄럭였다.

그녀와 그는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소주병이 ‘똑’ 소리를 내며 열렸고, 잔에 맑은 액체가 채워졌다. 철제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어색한 고요를 채웠다.

그가 먼저 잔을 들며 담담히 말했다.

“나, 이혼했어.”

그녀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답했다.

“나도.”

짧은 대답 뒤로 국물 끓는 소리와 바람에 천막이 펄럭이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술잔 사이의 침묵이 오래 머물렀다.

그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때 네가 내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자주 생각했어.”

그녀의 손가락이 술잔을 천천히 굴렸다.

“나는 그때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나고 싶었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을 거야. 나도 가진 게 없었으니까. 차마 널 붙잡을 자신이 없었어.”

그녀는 그의 눈빛 속에서 스무 살의 그를 보았다. 동시에 상처투성이로 여기까지 살아온 자신을 보았다. 호랑이 굴을 지나온 끝에서 다시 마주 선 첫사랑.

그는 잔을 기울이며 짧게 웃었다.

“이제야 그때 못한 고백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녀는 그의 눈빛 속에서 스무 살의 그를 보았다. 동시에 상처투성이로 여기까지 살아온 자신을 보았다. 호랑이 굴을 지나온 끝에서 다시 마주 선 첫사랑.

앞으로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오늘 밤 이 포차에서만큼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남은 소주를 비웠다. 천막 바깥에서는 여전히 바람이 불었고, 국물 냄새가 더 진하게 올라왔다. 잠시 말을 아끼던 고수가 잔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된 길을 한 번쯤 걷지. 중요한 건 돌아올 자리를 잃지 않는 거야.”

그녀는 그 말을 가만히 삼켰다. 눈앞의 잔이 텅 비어 있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조금의 따뜻함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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