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면 나는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타인의 담벼락을 서성인다.
타인의 삶을 보고, 생각을 엿보고, 때론 그 속내까지 읽는다. 누군가는 SNS를 유희로 즐기겠지만, 나는 때때로 그것을 관계중독처럼 소비했다.
저 사람은 어느새 저만큼 갔구나, 나는 아직 여기인데.
가끔은 제자리에 있는 듯한 나의 모습을 보며 위축감을 느꼈다. 열등감이 밀려왔다. 무기력함이 따라왔다.
나는 국문학을 전공했고, 상담을 공부했다. 심지어 상담은 석사 학위가 두 개나 된다.
문학이 좋았고, 상담도 좋았다. 그래서 어느 하나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두 가지를 다 안고 가려다 보니, 결국 어느 쪽에서도 끝까지 오르지 못한 채 서성이게 됐다. 문학과 상담, 그 사이를 오가며 나는 가끔 어디에도 마음 붙이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착하지 못한 마음, 그게 늘 나를 흔들곤 했다.
문학을 전공한 친구들은 그 길을 끝까지 걸었다. 석사, 박사, 강단, 연구. 상담을 공부한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를 만들었지만, 나는 늘 제자리에 멈춰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세 살 터울로 태어난 세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그저 잠시 숨을 고르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요즘,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둘 다 하길 잘했구나.’
상담을 공부하며 나는 비로소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법을 배웠다. 그 배움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붙잡고, 끝까지 귀 기울이는 힘으로 이어졌다. 내 안의 문학은 사람을 읽는 눈을 열어주었고, 상담은 그 눈으로 보게 된 마음을 다정히 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둘 다 필요했던 것이다.
밤마다 타인의 담벼락을 서성이던 시간들조차, 결국은 나를 길러낸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나는 나만의 언어로,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문학과 상담, 그 두 갈래 길의 끝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만난다.
늦게 알아차렸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서툴고 더딜지 몰라도, 나만의 속도로 이 길을 걸어간다.
그리고 이제, 내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파문이라도 일으키길 바란다.
언젠가 읽는 이의 마음 한편에 고요한 울림이 되어 닿기를, 조용히 소망한다.
그것이 내가 두 길을 끝까지 걸어왔던 이유였음을, 이제는 알 것 같아서.
당신에게도 전하고 싶어요.
혹시 당신이 지금 제자리에 멈춘 것 같은 마음으로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늦어도 괜찮아요. 서툴러도 괜찮아요.
우리 모두는 결국,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까요.
그 길 위에서 언젠가 당신의 이야기도 누군가에게 조용한 울림이 될 거예요.
나처럼, 당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