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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작가 Mar 29. 2022

그래서, 고양이를 키울 수 있을까?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만약 고양이를 키운다면 지금 우리 집 상태로는 어려웠다. 

나는 정말 정리가 어렵다. 솔직히 내 영역 밖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도 방이 지저분하다고 늘 엄마한테 혼이 났었다. 그땐 내 방을 치우긴 커녕 오빠 방은 치워주면서 왜 나만 치우라고 하냐고 불만이었다. 엄마는 “오빠들은 괜찮지만 너는 나중에 시집가서도 해야 하는데 이래서 어떡하니!” 라며 혼을 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내게 정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그럴수록 나는 불만만 커져갔다. 사춘기 시절에는 그냥 내 방을 보지 말라고 소리 지르기도 했다. 못된 년. 지금 생각해도 나는 사춘기 시절 정말 나쁜 년이었다.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그때는 내 방 하나라 어지럽혀도 모든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당당한 이유는 그거였다. 나는 다 어디 있는지 안다고. 내가 편하면 됐지 뭘 그러냐고.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짐이 늘어나고 집 전체를 관리해야 하는 시점이 오자 나는 혼란에 빠졌다.      

특히 예전 집에서 이사 올 때 아이는 돌 전이었다. 사촌언니의 막내는 큰 아이보다 5살이 많은데 언니에게 나는 모든 장난감과 옷을 물려받았다. 집에 돌쟁이 아기용품부터 9살 아이의 물건으로 집은 꽉 차있었다. 집에는 옷을 싼 보자기 뭉치가 쌓여있었다. 아기가 어려 그 짐을 정리하지 못 하고 다 짊어지고 이사를 했다. 이삿짐센터에서 집은 작은데 어떻게 이렇게 짐이 많냐고 놀라워했다. 


그 이후로 그날 이삿짐 아저씨들이 대충 넣어주는 대로 살았다. 아이가 커가면서 짐은 더욱 늘어났다. 나는 내 삶도, 아이를 키우는 것도, 치매 초기인 엄마를 돌보는 것도 모두 다 버거웠다. 조울증처럼 아이를 보며 웃어주다가 화를 내곤 했다. 그때 나의 유일한 위안은 엄마였다.      


“현정아, 그렇게 화내지 마..”     


엄마는 인지 장애가 시작되어 눈앞의 물건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내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 아이의 어깨 즈음을 바라보며 우는 아이에게 말했다.      


“지윤아 괜찮아. 할머니 어부바 하자.”

“현정아 힘들면 밥하지 마. 우리 나가서 사먹자. 아무것도 하지 마.”     


평생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것과 예의, 규칙과 옳고 그름을 강조했던 엄마는 어느새 내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말이 많지 않은 엄마는 말했다.     


“내가 뭐할려고 너희를 그렇게 키웠는지 모르겠다.”     


평생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 가족을 위해 살았던 엄마의 회한 어린 한 마디. 이 말 한마디는 나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많이 바꾸어놓았다. 




오랜 기간동안 내 삶은 엉망진창이었다. 

 어느 날, 친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현정아 내가 이번에 이사하면서 정리컨설턴트를 불렀는데, 그거 하면서 내내 니 생각이 났어. 너도 해보는 게 어때?”     

돈도 많이 들고 그럴 일인가 싶어 듣고 흘려버렸는데 친구는 나를 찾아오기도 하고 자기 집을 구경오라고 하기도 하면서 나를 설득했다. 결국 나는 정리컨설턴트를 불렀다. 과정은 정말 힘들었지만 정리하고 나니 집이 말끔하니 너무 좋았다.      


그. 러. 나. 


시간이 지나면서 짐은 더 많아졌고, 나는 아이와 엄마를 함께 돌보면서 깊은 우울의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 베이킹 스튜디오를 열어 열정적으로 일도 했다. 마음이 힘든 가운데 일을 하니 일이 내 전부인 것 같아서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다. 아이들도 소홀히 할 수 없어 6시면 땡 퇴근해서 밥 해주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재운 다음, 새벽 1시든 5시든 언제든 나가서 케이크를 만들었다. 나는 정말 멋진 케이크를 만들게 되었지만, 어느날 아이가 나를 원하는 것을 깨달았다. 물리적으로 아이와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모든 것을 접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를 보듬어야 했고, 나를 보듬어야 했다. 아이는 내가 보듬어주면 되는데 나는 아무도 보듬어주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엄마, 아빠도 보듬어야 했다. 10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이었는데 무슨 짐이 그렇게 많았는지. 뭐라고 되고 싶어서 이것저것 해보겠다고 주구장창 사댔다.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텅빈 마음을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잘 하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결국 그곳을 놓고 떠나와야 했다. 나는 여전히 그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리다. 집에서 가까운 상가이지만 난 여전히 그쪽으로 쉽사리 걸음을 옮기기 어렵다.      


집은 더 복잡해졌다. 모든 짐을 집에 가지고 들어왔는데 일주일도 넘게 거실을 꽉 채우고 있었다. 하나도 버리지 못 하고 여기저기 쑤셔 넣었다. 아이가 크면서 아이 영어공부를 엄마표로 해보겠다며 영어책을 왕창 사기도 했다. 결국 포기하고 학원을 보냈다. 차키를 찾지 못 해 회사에 간 남편에게 전화해서 묻는 건 다반사였다. 쌓인 설거지 더미 옆에서 요리를 했다. 밥을 먹은 그릇은 다음 끼니가 될 때까지 식탁 위에 있었다. 아일랜드는 늘 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존감이 낮아지고 있었다. 집에 있는 엄마에게 살림은 나의 일이 아니던가. 내 일을 제대로 못 한다는 생각에 늘 자책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내가 자책할 때마다 아이들은 늘 이런 말을 건내며 안아줬다.      


“엄마 괜찮아. 엄마는 잘하고 있어.”

“엄마, 이 정도면 깨끗한거야.”

“엄마는 뭐든 잘하잖아. 우린 괜찮아.”     


힘든 상황에서 상담도 받고, 나를 들여다보고 내려놓는 과정 속에서 내가 그래도 아이들을 잘 키웠나보다. 내 아픈 마음이 전달되지 않도록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렇게 잘 컸구나 싶어 고마웠다. 나를 죽이고 너희를 살리려 눈물로 밤을 지새며 그렇게 살았었는데. 내 인생이 그렇게까지 실패한 건 아닌가보다. 나는 아이들에게 큰 위로를 받았다. 마치 엄마가 내게 “현정아 괜찮아. 힘들면 아무것도 하지 마.” 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를 키우는 건 결국 내가 감당해야하는 일이다. 그건 현실이다. 아무리 아이들이 고양이를 예뻐해도 결국 책임지는 것은 어른의 몫이니까.

정말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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