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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작가 May 03. 2022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데 집사는 되기 싫어.

고양이 육아일기

고양이를 키우기 전부터 가장 거슬렸던 단어가 바로 ‘집사’다. 강아지 키우는 사람은 주인이라고 부르는데, 고양이 키우는 사람은 집사라고 한다. 나는 집사라는 말이 참 싫었다. 왠지 하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정말 별로다. 이건 육아를 하면서 느낀 감정과 연결된다. 




여자든 남자든 결혼 전과 결혼 후의 삶이 참으로 다르다. 때로 아이를 낳아도 아이가 없는 사람처럼 사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찌질한 모습으로 아이를 돌보다가 거울을 보고 현타가 오곤 한다. 


결혼을 준비할 때 나는 공주님이 되는 것 같았다. 모두가 신부가 되는 나를 위해줬고, 드레스를 입어보고 반지도 샀다. 신혼집을 꾸미고 프로포즈를 받았으며 수많은 사람들에 결혼식에 와서 축하해줬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결혼하고 사는 건 마치 남자친구와 여행을 온 것 같았다. 금방 아이가 생겨 아이를 낳았고 물론 행복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난 더 이상 공주님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청소와 빨래를 했다. 공주는 갑자기 하녀가 되었다. 아이가 하나일 땐 그나마 조금 나았다. 아이가 둘이 되자 정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아마 대부분 공감할 거다. 맞벌이일 땐 조금 나았다. 아이를 돌봐주시는 분이 계셨고 남편도 일하는 내가 힘들 거라 생각해 시간도 조정하고 도움을 주었다. 더 힘들어진 건 오히려 직장을 그만둔 후였다. 내가 집에 있게 되자 남편은 이제 집안일은 걱정할 게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그렇다고 남편이 다른 걸 대단히 한 건 아니고 회사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불평을 할 수도 없었고 답답하고 힘들었다.      


그런데 고양이 집사라니? 그 말 자체가 정말 싫었다.

나는 아이를 잘 키우려고 무진장 노력하는 엄마였다. 잘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뒤늦게 내가 아이들을 상전으로 키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몇 년 전 미국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갔었다. 친구 집에서 한 달 넘는 기간을 함께 지냈다. 중간 중간 여행도 가고 집을 비우는 날도 있었지만 우리 가족을 받아준 친구에겐 평생 은혜를 갚으며 살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고마웠다. 아이들이 다툼 없이 잘 지냈고 무던한 남편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함께 살아볼 기회는 극히 드문데 우린 그런 경험을 공유한 사이가 되었다. 무식하게 떠났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주 좋은 추억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날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어떻게 애가 뭘 먹고 싶다 그러면 바로바로 해주니? 무리하지 말고 다음 날 해준다고 해.”

“응? 애가 먹고 싶다고 해서 해준 건데?”

“그래 그렇긴 한데, 그냥 해주는 거 먹으면 되지 어떻게 그렇게 애가 원하는 걸 매일 다 해줘?”     


뒷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아이가 잘 먹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다. 우리 아이들은 입이 짧아 뭐라도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당장 장을 봐서라도 해줬다. 어른들과 식사를 할 때도 아이들을 배려한답시고 너희들 뭐 먹고 싶니? 묻곤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아이는 지금 자기가 먹고 싶은 거 말고는 입에 안  대는 경우도 생겼다. 외식 메뉴를 정할 때도 아이가 정하는 게 자연스럽게 되었다. 밥을 하다가도 종종 열받는 일이 생긴다.     


“그냥 엄마가 주는 거 먹어!!!”     


내가 그렇게 키워놓고 뭘 또 화를 내나. 친구가 해준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애를 상전으로 키우고 있었구나. 그때부터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먹고 싶다는 걸 그 즉시 해주기 어려워. 집에 재료가 있을 땐 해줄 수도 있지만 네가 먹고 싶은 걸 말하면 다음에 시장 볼 때 사서 해줄게.”     


나는 애가 원하는 걸 다 해주다가 지쳐서 화내는 것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자기주도적으로 사는 친구의 삶에 잠시 들어가 보고서야 깨달았다. 남이 원하는 것을 억지로 힘들게 다 맞춰주다가 폭발하면 상대는 왜 저러나 싶을 때가 있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해줄 수 있는 만큼만 해주고 못 할 때는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 내가 화가 덜 나니 서로가 조금 더 행복해진다. 적당히 내 삶을 삶면서 서로를 배려해주고 사랑하면 충분하다.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하고 나서 나는 고양이 집사가 아닌 엄마가 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랑 일주일 사니까 집사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 붙을 때도 있다. 참으로 신비한 고양이 녀석. 고양이에게는 원하는 걸 다 해주지 않고 내 삶과 고양이의 삶에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적당한 불편함을 참아내는 걸 배워가는 시간이 인간이든 고양이든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 루미 고양이가 너무나 사람을 좋아하는 무릎냥이라 난 완전히 순한 아이인 줄 알았다. 우리집에 온지 열흘 즈음 느껴진다. 얘는 우리 딸처럼 품에 안겨있는 걸 좋아하는 거지, 까다롭지 않은 게 아니다. 발톱 깎는 것도, 목욕하는 것도, 목걸이 두르는 것도 다 싫어한다. 목걸이는 형님께 받았는데, 피노는 잘만 하고 있었다던데 얘는 어찌나 싫어서 바둥거리던지. 목걸이도 적응을 해두는 게 좋다길래 안 빼주고 놀아주고 재워주고 했더니 잘 지낸다.      


“지금 약간의 불편함을 이겨낼 수 있다면 넌 우아하고 편안한 고양이가 될 수 있을 거야.”     




지난주만 해도 품에만 있던 고양이가 점점 활발하게 뛰어다니고 움직인다. 고양이의 1년은 7년과 비슷하다던데, 그렇다면 지금 인간으로 치면 돌이 조금 지난 시기같다. 집에 올 땐 아장아장 걸을 정도였다면 이젠 우다다 뛸 수 있는 나이. 앞뒤 안 보고 직진하는 시기가 아닐까? 나는 호기심 많은 루미를 늘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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