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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이 감상했던 농암 어부가의 '청고엽상량풍기'

고菰,줄(Z. latifolia)-향토문화의사랑방안동, 2025년7/8

by 경인

4월 25일 창녕의 성씨 고택에서 개최된 <문헌과해석 춘계학술대회>가 마무리된 후, 아석헌我石軒 마당에서 열린 국악 공연을 가까이서 감상한 것은 내게 문화충격으로 다가왔다. ‘찾아가는 고택 연주시리즈 (2)’라는 부제가 붙은, 전통공연예술콘텐츠연구소가 주최한 <창녕 성씨고택 연주회>는 임미선 교수님의 유려한 해설로 진행되었다. 이 공연에서 나는 국악 예술가 다섯분의 연주와 노래를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거문고산조, 어부사, 단소와 퉁소 연주, 아쟁산조, 배따라기와 배뱅이굿 등 고택 마당에 넘실거리던 소리들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연주가 끝날 때 마다 나는 청중과 함께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창녕성씨고택 연주회 팜플렛


공식 연주회가 끝난 후, 뒷풀이 장소에서도 임미선 교수님과 공연자 몇 분이 참석하여 여러가지 소리를 더 들려주셨다. 6현으로 구성된 거문고로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 비교 연주를 해 주시는가 하면, 거문고의 악기 구성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덕분에 주로 오동나무와 밤나무로 거문고를 만든다는 것도, 문현(제1현), 무현(제6현)을 포함한 6개 현 이름도, 연주는 주로 유현(제2현)과 대현(제3현)으로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국악 공연자분들과 자리를 함께하면서 이렇게 생생한 공연과 설명을 들었으니, 가히 국악 문화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다음날 오전에는 대구 간송미술관으로 이동하여 그 유명한 훈민정음을 포함하여 국보급 서화와 도자기들을 직접 보았다. 문헌과 해석 선생님들께서 진지하게 감상하고 감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덩달아 나도 그 걸작들을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려 했다. 점심은 간송미술관 인근의 식당에서 먹었는데, 우연히 거문고와 어부사를 연주해주신 두 분과 합석하게 되었다. 테이블마다 동동주 한동이가 곁들여지면서 점심 자리는 온갖 이야기로 더욱 풍성해졌다.


퇴계선생 친필 시고 범주분천의 '홍수창어사紅袖唱漁詞' (우측에서 4째줄) (서수용 선생 발굴)++


전날 고택 마당에서의 국악 공연 감동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화제가 어부사漁父詞에 이르렀을 때, 불현듯 몇 해 전에 보았던 퇴계 선생 친필 시고가 떠올랐다. 퇴계선생이 형 온계溫溪 이해李瀣(1496~1550)와 함께 농암 이현보李賢輔(1467~1555) 선생을 모시고 낙동강 상류인 분천에서 뱃놀이했을 때 지은 시인데, 이 시에서 어부가가 불리어진 정황을 읊은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 것이다. 나는 퇴계선생이 감상했던 어부가를 화제에 올리고, 이것이 시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어부사 공연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이야기했다. 어부사를 부른 연주자가 관심을 보여서, 페이스북에 올렸던 퇴계선생 시고 사진과 내용을 찾아 보여주었다. 나의 2022년 10월 15일자 페이스북 기록에는 퇴계선생 친필 시고의 내용을 처음 파악했던 당시의 감동이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얼마전 고교동기 이교수로부터 보학에 조예가 깊으신 고향 출신의 이종문 선생을 소개받았다. 이선생과 예안지방에 얽힌 인연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던 중에 보내주신 책이 이동식선생이 쓰신 <온계 이해 평전>이다.* 짬이 날 때마다 펼쳐보고 있다. 1549년 가을에 퇴계선생과 온계, 농암 이현보 선생이 분강에서 뱃놀이하는 부분을 묘사한 ‘선상음악회’를 읽다가 고문헌연구가 서수용 선생이 발견해서 공개했다는, 퇴계집에도 실려 있지 않은 퇴계의 시가 소개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꽤 여러 해 전에 서울에서 서수용 선생을 뵌 적이 있는데 그 때 퇴계 필적의 시고 복사본 한 장을 주셔서 받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눈 대화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바로 이 퇴계 시를 말씀하신 듯하여 찾아보니 바로 그 시다. 퇴계 친필을 감상하면서 시를 읊으니 좋구나.


山寺烹茶後 산사에서 차를 마시고 나온 뒤요,

江船喚酒時 다시 배를 타고 술을 부를 때로세.

綠波攝綺席 푸른 물결 비단 자리에 넘실대고

紅袖唱漁詞 어여쁜 기생들 어부가를 불러대네.


福地非人世 명산 복지라 인간 세상 아니요,

仙風異俗姿 신선 풍도는 속세 모습 아닐세.

吾儕亦何幸 우리들 또한 무슨 요행을 만나서

醉德舞僛僛 덕에 취해 덩실 춤출 수 있었나.

- 형님[온계 이해]과 함께 농암 선생을 모시고 병암屛菴에서 유람하다가 저물녘에 분천汾川에서 배를 탔다. (번역은 <온계 이해 평전> 인용)


1549년이 그리 머나먼 과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농암 이현보는 어부가를 정리한 것으로 유명했으니, 1549년 당시 어여쁜 홍수紅袖가 노래한 어사漁詞는 바로 농암이 정리했던 어부가漁父歌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농암의 어부가가 아름다운 봄날 밤, 고택 마당에 울러퍼졌던 어부사와 같은 내용인지 궁금해졌다. 다행히 공연 팜플렛에는 어부사 가사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설빈어옹(雪鬢漁翁)이 주포간(住浦間)하야

자언거수승거산(自言居水勝居山)을 배 띄여라 배 띄여라

조조재락만조래(早潮纔落晚潮來)라

지국총지국총어사와(至菊叢至菊叢於斯臥)허니

의선어부일견고(依船漁父一肩高)라

청고엽상량풍기(靑菰葉上涼風起)허고

흥요화변백로한(紅蓼花邊白鷺閑)을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동정호리가귀풍(洞庭湖裏駕歸風)을

지국총지국총어사와(至菊叢至菊叢於斯臥)허니

범급전산홀후산(帆急前山忽後山)을


농암집, 어부사 (한국고전종합DB 이미지)

농암집에 실려있는 어부가를 확인해보았다. 어부가 총 9장 중 앞부분 일부를 고전번역원 번역으로 인용한다.**


귀밑털이 흰 어부가 갯가에 살며

물에서 사는 것이 산에 사는 것보다 낫다고 하네. 배 띄워라 배를 띄워라

아침 썰물 빠지고 나면 저녁 밀물 오는구나

찌그덩 찌그덩 엇샤

배에 기댄 어부 한 쪽 어깨가 솟았구나


푸른 향초 잎사귀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붉은 여뀌 꽃 가에 흰 백로가 한가롭구나. 닻 들어라 닻을 들어라

동정호 속으로 바람 타고 들어가리라

찌그덩 찌그덩 엇샤

돛대 급히 올리니 앞산이 문득 뒷산이 되는구나.



내가 창녕의 고가에서 감상했던 어부사가 퇴계선생이 1549년 가을 낙동강 상류 분천의 뱃놀이에서 즐겼던 바로 그 어부가라니, 정말 놀라웠다. 농암선생이 기록한 어부가는 팜플렛에 실려 있는 어부사 가사와 정확히 같았던 것이다. 이현보는 “가정嘉靖 기유년(1549) 여름 6월 18일 귀밑머리 흰 늙은이 농암 주인이 분강의 고깃배 뱃전에서 쓴다.”라는 어부가 병서를 남기고 있다. 분천에서 어부가가 불리어진지 벌써 476년이 흘렀으니, 곡조와 발음이야 조금씩 달라졌겠지만,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온계이해평전>의 ‘선상음악회’ 부분을 펼쳐보았다. 앞에서 소개한 퇴계선생 시는 퇴계집에도 실려 있지 않으며, 고문헌연구가 서수용 선생이 발견해 공개한 것이라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었다, 또한 평전의 저자 이동식은 “어부가를 부른 것은 이 시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말하자면 6월에 어부가를 만들었지만 이를 노래했다는 것은 이 시에서 처음 나오므로 농암이 온계와 퇴계를 불러 어부가를 제대로 선보였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다시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음악인들이 유명인사들 앞에서 어부가를 초연한 것이 된다.”***라고 하여, 퇴계가 시로 남긴 어부가 공연의 의미를 밝히고 있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시에 “애끊는 어부가 소리에 (腸斷一聲漁父歌)”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최소한 어부가는 고려시대부터 불리어진 노래일 터이다. 그리고 이현보가 정리한 어부가는 1549년 가을에 초연된 후 오랫동안 가사가 그대로 전승되었고, 2025년 봄 창녕의 고가 마당 공연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전통이란 이렇게 면면한 것인가 하는 감동이 밀려왔다. 조상의 숨결을 느끼며 농암 선생의 어부가 9장을 찬찬히 음미해보았다. 고전의 식물을 탐구하는 필자의 눈에 한자로 표기된 어부사의 식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장가 9장의 청고靑菰, 홍료紅蓼, 류柳, 녹평綠萍, 죽竹, 도화桃花, 단가 5장의 청하靑荷, 녹류綠柳, 노적蘆荻 등이다. 홍료紅蓼는 붉은 여뀌, 류柳는 버들, 녹평綠萍은 푸른 개구리밥, 죽竹은 대, 도화桃花는 복숭아꽃, 청하靑荷는 푸른 연(꽃), 노적蘆荻은 갈대와 물억새이다. 그런데 ‘청고엽상(靑菰葉上)애 량풍기(涼風起)’의 ‘푸른 향초’로 번역된 청고靑菰는 언뜻 어떤 식물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강가나 호수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 때 물결처럼 흔들리는 잎새를 묘사했으니, 분명 물가에 자라는 식물일 터이다.


어부사의 식물들 : 여뀌, 버들, 개구리밥(부평), 대, 복사꽃, 연꽃, 갈대, 물억새


식물학 문헌들을 참고해보니 ‘고菰’는 바로 ‘줄(Zizania latifolia)’ 이었다. <식물의한자어원사전>에서 고菰의 학명을 Zizania latifolia라고 설명했고, <초사식물도감>과 <중국식물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문헌으로는 <동의보감> 탕액편에 “고근菰根. 물 속에서 자란다. 잎은 사탕수수(蔗 Saccharum sinense)와 물억새(荻) 같다. 오래된 뿌리는 두텁게 굴곡지며 여름철에 버섯이 생기면 먹을 만 하고, 고채菰菜라고 한다. 3년 이상 되면 중심에 연뿌리 같은 백대白臺가 생긴다. 흰 부분은 연하여 씹어먹을 만하며, 고수菰首라고 한다. 가을이 되어 맺은 열매가 조호미彫胡米인데 밥을 지을 수 있다.”****로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고菰의 한글 이름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훈몽자회>나 <신증유합>에도 ‘고菰’의 한글 훈은 보이지 않는다.


(좌) 백련초해 동경대본 - 청고엽상량풍기, (우) 줄 가을 모습 (2023.10.21 율동공원)


더 찾아보니,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가 편찬한 한시 입문서로 알려진 <백련초해百聯抄解>에 어부사의 구절인 “청고엽상량풍기(靑菰葉上涼風起)”가 실려 있었다. 세종한글고전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백련초해> 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동경대본에는 한자 ‘고菰’ 아래에 한글로 “줄 고”라는 훈이 달려 있었다.***** 동경대본의 정확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16세기 중엽 이후 장흥에서 간행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으니, 분천에서 어부사가 불리어진 당시에 우리 조상들이 ‘고菰’를 ‘줄' 풀로 이해했을 것이다. <조선어사전>에서는 “고근(菰根) (名)(藥) 眞菰(まこも)의根”, “줄(名)(植) 菰(まこも)와 비슷한 일종의 풀”이라고 수록하고 있다. ‘마코모(まこも)’는 줄(풀)의 일본명이므로, 1910년대 우리 조상들도 고菰를 줄 풀로 이해했다. 그 후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에서 식물학자들이 Zizania latiflora에 대해 향명 ‘줄’을 부여하고, 한자명 ‘고菰’를 병기함으로써 이 식물명은 정착되었다. 이제 어부가의 “청고엽상량풍기”는 “푸른 줄 잎사귀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다행히, 대부분의 어부사 해설서에서는 이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줄 (2016.7.3 양평 양수리)


벼과에 속하는 다년초 줄(Zizania latifolia)의 줄기는 높이 1~2이며 땅속줄기가 굵고 길게 벋는다. 잎은 너비 1~3cm의 납작한 선형이다. 꽃차례는 원뿔형이며 가지는 비스듬히 서거나 벌어진다. 개화/결실기는 7~10월이며, 우리나라 전국의 연못, 저수지, 하천 등에 자생한다.****** 나도 여러 차례 줄을 만난적이 있고, 가까이에서 본 것으로는 성남의 율동공원 저수지 가에 무리지어 자라는 줄이 인상적이었다. 고향에서 가까운 도산면 분천에 지금도 줄이 자라고 있을까? 올 여름에는 줄 푸른 잎새가 호수에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감상해야겠다. 그때 다시 어부사의 ‘청고엽상량풍기’를 읊조리면서!

<2025.4.29 -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통권217호, 2025년 7,8월, pp.66~73.>


*이동식, 온계이해평전溫溪李瀣評傳, 2020, 휴먼필드, pp.273~282 (선상음악회)

**李賢輔, 聾巖集, 번역문에 해당하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雪鬢漁翁이 住浦間 / 自言居水이 勝居山이라 하놋다. 배떠라 배떠라 / 早潮纔落晩潮來하나다 / 至匊悤至匊悤於思臥 /倚船漁父이 一肩이 高로다. / 靑菰葉上애 涼風起 / 紅蓼花邊白鷺閒이라. 닫드러라 닫드러라 / 洞庭湖裏駕歸風호리라 / 至匊悤至匊悤於思臥 / 帆急前山忽後山이로다.”

***온계이해평전, p.279.

****菰根 生水中葉如蔗荻 久根盤厚 夏月生菌堪食名菰菜 三年已上 中心生白臺如藕 白軟堪啖 名菰首 至秋結實乃彫胡米 可作飯 -동의보감. (<중국식물지>에 고菰의 俗名으로, 高笋 菰笋 菰首 茭首 菰菜 茭白 野茭白 茭笋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중 菰菜와 菰首가 <동의보감> 탕액편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菰에 대한 이해는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한글고전, <백련초해> 동경대본. (세종한글고전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백련초해> 박은용본에서는 ‘고菰’를 ‘갈’, 즉 갈대로 번역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이현보가 정리한 어부사에서 갈대를 ‘노蘆’로 표기했고, 또 갈대를 뜻하는 ‘위葦’ 등 다른 글자도 있으므로 고菰가 갈대일 가능성은 적다.)

******김진석 김종환 김중현, 한국의 들꽃 – 우리 들에 사는 꽃들의 모든 것, 돌베개, 2018. 참조

+ 줄 (2011.8.28 성남)

++ 퇴계친필 시고 사진 사용을 허락해주신 서수용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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