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석류安石榴, 해류海榴, 석류石榴, Punica granatum
여름철에 접어든 음력 5월은 석류꽃이 피어 유월榴月이라고 한다. 유럽 및 서남아시아 원산으로 추정되는 석류는 우리나라에 늦어도 고려 초기에 도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강희안(1417~1464)은 <양화소록>에서 “석류는 꽃이 피었을 때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열매도 먹을 수 있고 완상할 수 있어서 고금의 사람들이 많이 숭상했다.”*라고 했다. 조선시대의 수많은 문인들이 석류를 노래했고, 안평대군(1418~1453)의 ‘비해당 48영’에도 ‘안석류安石榴’가 들어있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도 석류를 읊은 시를 남겼다.
칸옥션 제37회 미술품경매 출품 도록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선생의 친필 시고가 수록되어 있다. 이가원 선생의 '퇴계선생진적'이라고 쓴 감상인이 찍혀 있는 ‘사시유거호음四時幽居好吟’ 시고이다. 이 중 여름철 시골살이의 즐거움을 읊은 시에 “석류꽃 때마침 활짝 피었고 (海榴花正發)”라는 구절이 있는 것이다. 도록에 실려있는 시와 번역문을 인용한다.**
여름철 그윽한 곳에 사니 좋구나
찌는 더위 시냇물에 씻어버리네
석류꽃 때마침 활짝 피었고
소상반죽 새순이 막 돋아 가지런하네
옛집엔 구름이 섬돌에 나고
깊은 숲에선 사슴들이 새끼를 기르네
예로부터 몸 가리고 재계했으니
미혹되어 부드러운 도에 이끌리지 마오.
夏日幽居好(하일유거호)
炎蒸洗碧溪(연증세벽계)
海榴花正發(해류화정발)
湘竹笋初齊(상죽순초제)
古屋雲生砌(고옥운생체)
深林鹿養麛(심림록양미)
從來掩身戒(종래엄신계)
柔道莫牽迷(유도막견미)
'사시유거호음'은 퇴계집에도 실려있다. 목판으로 새겨진 시와 친필 시고를 같이 살펴보았다. 친필 시고가 여러 제자들에 의해 정리되어 문집에 수록되기까지 거쳤을 긴 여정을 상상해본다. 목판본 퇴계집의 ‘사시유거호음’ 중 겨울철을 읊은 시의 '축장개포지築場開圃地' 구절 위에, "’개포지開圃地(채소밭을 일구다)’가 어떤 책에는 ‘간렴적看斂積(거두어 쌓아 둔 것을 보다)’로 되어있다."라는 주석이 붙어있다. 실제로 친필 시고를 보면 해당부분이 '개포지開圃地'가 아니라 '간렴적看斂積'으로 쓰여진 것을 알 수 있다. ‘간렴적看斂積’은 "추수하여 마당에 쌓아 놓은 곡식을 바라본다", ‘개포지開圃地’는 “채소 밭을 일군다”라는 뜻일 것이다. 아무래도 ‘간렴적看斂積’이 원고일 터인데, 어떤 과정을 거쳐 ‘개포지開圃地’로 실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사실이다.
퇴계선생 친필을 보고 있자면 웬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도록의 ‘사시유거호음四時幽居好吟’ 시고도 여러 번 펼쳐 보았다. 사실 퇴계선생 친필 시고에서 위 시를 본 후부터 나는 안동에서 직접 석류꽃을 감상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안동에서 몇 차례나 석류나무를 본 적이 있었지만, 주로 이른 봄철이라서 갈색으로 말라버린 열매를 매달고 있는 잎이 없는 앙상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타향에 살면서 석류꽃이 필 무렵 고향을 다녀오는 것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올해는 예안향교 분향례 참석을 위해 안동을 다녀오기로 한 날이 때마침 석류꽃이 핀다는 유월榴月, 즉 음력 5월의 초하룻날이었다. 이번에는 안동에서 꼭 석류 꽃을 봐야지 다짐하면서 새벽 일찍 안동으로 향했다. 오전에 예안향교 분향례에 참례하고 점심을 먹은 후 오후에 귀경길에 오르면서 일부러 석류나무를 본 적이 있는 풍산 읍내와 체화정에 들렀다.
체화정 정원의 석류나무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바로 근처인데도 풍산 읍내 주차장 옆 석류나무는 이미 열매가 맺히고 있었다. 다행히 꽃도 몇 송이 남아 있어서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읍내에서 체화정으로 가는 길 옆 빈 집 마당에도 석류 꽃이 피어 있었다. 브로크 담장 너머로 보이는 석류 꽃을 찍기 위해 한참 동안 발 돋음 하며 서성이자, 길 건너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다가오신다. 주인이 팔려고 내 놓은 집인데, 혹시 살 마음이 있으면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신다. 갑자기 석류나무만 팔 수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판다 해도 심을 정원이 없는 내 처지가 떠올랐다. 나는 “석류 꽃이 참 예쁘네요.”라고만 대답하고, 사진만 몇 장 찍겠다고 했다. 빈 집의 석류를 한창 구경한 후, 퇴계선생의 싯구 ‘해류화정발(海榴花正發)’을 되뇌며 귀가길에 올랐다.
<끝, 2025.6.21>
*榴花 非特花開可愛 實亦可食可玩 故古今人多尙之 – 양화소록/석류화
**칸옥션 제37회 미술품경매 (2025.4.24) 도록, pp.48~49.
+표지 - 석류나무 (2023.6.10 목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