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형紫荊
매화 국화의 눈 속의 뜻과
소나무 대나무의 서리 내린 후 푸르름이
마침내 세한옹歲寒翁과 더불어
대려帶礪*의 맹세 함께 이루리라.
梅菊雪中意(매국설중의)
松篁霜後色(송황상후색)
遂與歲寒翁(수여세한옹)
同成帶礪約(동성대려약)
6월 초순에 나는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1577~1650)이 영양 입암의 연당리에 조성한, 조선시대 3대 민가 정원 중 하나라는 서석지瑞石池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경정敬亭 앞의 400여년된 은행나무 고목은 위풍당당했고, 서석지 연못에는 바야흐로 초여름 연 잎이 우거지고 있었다. 위 시는 정영방이 서석지 일대를 읊은 ‘경정잡영敬亭雜詠’ 중 하나인 ‘사우단四友壇’이다. 사우四友는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가리킨다.
그런데 정영방이 1613년에 사우단을 조성할 당시에는 매화가 없었다고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우단 조성과 관련한 '경정잡영'의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다. “송국松菊은 있은 지 오래이고, 대나무는 축산竺山(현 용궁)에서 옮겨왔다. 매화는 소중하여 멀리 옮길 수 없었다. 이제 자형紫荊의 담박함과 연꽃의 맑은 향기, 석죽石竹의 곧은 절개로써 그윽하고 정결한 취미를 돕고자 한다. 또한 매화가 없는 것에 대한 보완도 될 것이다.”** 서석지 관람 전에 경정잡영을 대략 훑어본 터라, 나는 정영방이 매화 대신 사우단에 심었다는 자형紫荊과 석죽石竹, 즉 박태기나무와 패랭이꽃이 보고 싶었다.
사우단에는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와 매실나무, 작은 대나무(이대) 떨기와 국화가 자라고 있었다. 소나무와 대나무는 푸르렀고, 이른 봄에 꽃피었을 매화는 매실이 토실토실 익어가고 있었다. 국화도 두어 뼘 싹이 올라와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박태기나무와 패랭이꽃이 있을까 살펴보았는데 사우단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사우단 양 옆에 꽃이 진 노랑해당화++가 한 그루씩 자라고 있었고, 축대에는 담쟁이덩굴이 싱그러웠다. 주일재 왼쪽에는 배롱나무 한 그루가 매끈한 수피를 자랑하며 꽃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오갈피나무도 자라고 있었으나 박태기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서석지를 한 바퀴 돌면서 찬찬히 살펴보니, 과연 박태기나무가 서너 그루 보였다. 자주색 꽃이 다닥다닥 피는 봄이었다면 쉽사리 눈에 띄었을 텐데, 녹음이 우거진 여름철이라 뭇 수목들 사이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사우단 오른쪽 해당화 옆 담장 가와 담장 너머에, 경정 입구 사철나무 옆에서 벌써 콩깍지 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정영방 선생의 12대 후손인 정중수 교수의 안내로 서석지 관람을 마친 후 둘러본 동네 어귀에도 박태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정 교수에게 패랭이꽃을 물어보았더니,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했으나 찾지 못했다.
박태기나무 자형紫荊은 남북조 시대(386~589) 양梁나라 오균吳均이 지은 <속제해기續齊諧記)>의 다음에 소개하는 고사로 인해 형제 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졸저『옛글의 나무를 찾아서』의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박태기나무, 자형紫荊”에서 한 토막 인용한다.
“경조京兆(수도를 다스리는 관리) 전진田眞은 3형제였다. 함께 재산 분할을 의논했는데, 모든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었다. 집 앞의 자형紫荊 나무는 1그루뿐이어서, 3조각으로 쪼개기로 함께 이야기했다. 다음 날 자르러 갔더니 그 나무는 불에 타버린 듯이 말라 죽어 있었다. 전진이 가서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아우들에게, ‘나무는 본래 한 나무인데, 나누어 쪼개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초췌해진 것이다. 사람이 나무만도 못하구나.’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크게 슬퍼하면서, 다시는 나무를 자르지 않겠다고 했다. 나무는 이 소리에 감응하여 다시 꽃을 피우고 무성해졌다. 형제는 서로 느낀 바가 있어서 재산과 보물을 합치고, 드디어 효도를 다하는 가문이 되었다. 전진은 벼슬이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르렀다. 육기陸機의 시에 ‘삼형환동주三荊歡同株’가 있다.”***
정영방은 또 매화 대신 박태기나무 등을 심으면서 “하물며 연꽃은 군자라 칭하며, 자형은 (형제 간의) 우애를 알고 석죽은 탕액에 들어간다. 비록 덕행과 재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덕행과 재능을 겸비한 것과 더불어 한 집에 거처하고 있으니, 어찌 나에게 덕이 되는 벗이 아니겠는가? 만일 매화의 높은 품격을 당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한다면,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박태기나무가 우애를 상징하는 것에 더해 매화의 품격과 비교해도 못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정영방이 사랑한 자형이니, 서석지 어딘가에 품격있는 박태기나무 고목이 있을 듯도 한데, 내가 본 것들은 모두 심은지 오래되지는 않은 듯했다. 아마도 정영방 후손들이 언젠가 사우단의 뜻을 살려 매실나무를 구해 심으면서, 박태기나무 고목은 없어진 듯하다. 사우단을 읊으면서 정영방은 “대려帶礪의 맹세 함께 이루리라”고 기원했다. 그의 후손들이 서석지를 지키면서 영원히 이어지길 바랐을 터이다. 매화를 옮겨오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집안의 화목을 기원하며 박태기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이러한 석문 선생의 뜻을 이어서, 서석지의 박태기나무들은 고목이 될 때까지 오래도록 봄마다 가지에서 자주색 꽃을 듬뿍 피우는 모습을 보고싶다. 박태기나무 열매가 여무는 가을철에는 패랭이꽃도 나란히 피어나면 더욱 뜻깊을 듯하다.
<끝>
*대려帶礪는 황하黃河가 띠가 태산泰山이 숫돌이 되도록 않는다는 뜻. 유방劉邦이 개국 공신들을 책봉하면서 “황하가 띠처럼 되고, 태산이 숫돌처럼 될 때까지, 나라가 영원히 후손들에게 전해지도록 할 것을 맹세한다. (使河如帶 泰山若礪 國家永寧 爰及苗裔)”라고 말한 고사.
** 松菊仍舊有 竹移自竺山 梅重不可致遠 今以紫荊之苦淡 蓮之淸馥 石竹之耿介 資之以幽貞之趣 亦可以補梅之缺耶 – 석문집
*** 권경인,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 “자형紫荊 -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박태기나무”, 이유출판, 2023, pp.198~199.
**** 况蓮穪君子 紫荊識友于 石竹入湯液 雖謂之備德行兼才能可也 備德行兼才能者 與之處一堂 豈非吾益友乎 若曰猶未足以當梅兄之標格 吾不信也 - 석문집
+표지사진 - 박태기나무 (2025.6.8 영양 서석지)
++노랑해당회는 열두달숲 이선생이 동정해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