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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방산(桂芳山)에서 계수나무 꽃향기를 맡으며!

꽃개회나무. Syringa wolfii

by 경인

계방산은 강원도 평창군과 홍천군의 경계에 있는 해발 1,577m의 산이다. 오대산국립공원 구역 안에 있는 산으로, 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높은 산이다. 하지만 해발고도 1,089m의 운두령에서 걷기 시작하면 능선길로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작년 장마철 막바지에 나는 동생들과 계방산에 오르기 위해 운두령으로 갔으나, 전날 내린 폭우 때문인지 입산금지로 등산로가 막혀 있었다. 대신 평창과 영월 경계의 백덕산에 올랐으나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올해 다시 계방산에 오르기 위해 6월 29일 아침에 운두령으로 향했다. 장마철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었고 입산 통제도 없었다.

넓은잎범꼬리 (2025.6.29 계방산)
꽃개회나무 (2025.6.29 계방산)
생열귀나무(붉은인가목) (2025.6.29 계방산)


운두령에서 계방산 정상까지는 4.1Km 남짓 완만하게 오르는 길이었다. 적당히 구름이 낀 날씨에 각종 식물과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걷는 숲길은 그윽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곳곳에서 만난 꽃개회나무 꽃과 넓은잎범꼬리 군락은 일품이었다. 가지 끝에 풍성한 꽃 송이를 매달고 있는 꽃개회나무는 만날 때 마다 사진에 담았는데, 정상에 가까울수록 더 아름다운 꽃이 나타나서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누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桂芳山(계방산) 해발 1577m’라고 새겨진 돌이 세워진 정상에 다다랐을 때엔, 수십여 그루의 꽃개회나무 군락에 꽃이 만개하여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정상석 오른쪽으로는 고산 지대의 자생종 야생 장미 류인 생열귀나무(붉은인가목) 서너 그루에도 꽃이 만발했다. 아마도 꽃개회나무와 붉은인가목 개화시기를 가늠하면서 날짜를 잡았다 하더라도 이 날처럼 좋은 날짜를 잡기는 어려울 정도로 멋진 모습이었다.


꽃개회나무 만발한 꽃 무더기 (2025.6.29 계방산 정상)


갑자기, ‘계수나무 꽃향기가 좋은 산’이라는 뜻의 ‘계방산桂芳山’이 바로 이 꽃개회나무 꽃향기를 기리는 이름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졸저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에는, 흔히 ‘계수나무’로 번역하는 ‘계桂’가 어떤 나무인지 살펴본 ‘선녀와 토끼가 살고 있는 달나라 계수나무는?’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계桂’가 일제강점기 이후 공원수로 많이 심는 계수나무(Cercidiphyllum japonicum)가 아니라, 우리나라 남쪽 지방에 정원수로 사랑받는 목서(Osmanthus fragrans)나 우리나라에는 자라지 않는 육계나무(Cinnamomun cassia)일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글에서 ‘계桂’는 대부분 특정 식물 종(species) 보다는 관념적이고 관용적인 의미로 쓰인 듯하다.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달나라 계수나무’라는 표현 뿐 아니라 문과에 급제한 것을 “계수나무를 꺾었다”라고 하기도 하고, 세자를 보필하는 세자익위사의 별칭은 ‘계수나무 마을’이라는 뜻의 계방桂坊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나무를 가리킨 사례도 있다. 예를 들면, 다음에 소개하는 허균許筠(1569~1618)이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풍악기행楓嶽紀行’중의 시 ‘계수나무를 읊다 (詠桂樹)’이다.


桂樹來南海 계수桂樹 나무는 남해에서 왔는데

何年植此山 어느 해에 이 산에 심었을까?

天香風處落 하늘 향기 바람 따라 날리니

疑是月中攀 마치 달 속을 거니는 듯!


금목서 (2024.11.13 완도수목원)
목서 (2024.10.12 해남)


이 시는 금강산에서 본 향기 좋은 특정 나무를 달나라 계수나무에 비유하여 읊고 있다. 남해에서 왔다는 표현으로 보아, 남부지방에서 가져와 어딘가에 심은 목서 꽃을 금강산에서 본 것일까? 허균은 1603년 가을에 금강산을 유람했다고 하고, 목서 꽃은 늦가을에 피므로 꽃 피는 시기도 얼추 맞다. 하지만, 이 시에서 ‘계수桂樹’를 목서 류로 추정할 수는 있어도 확실하게 어떤 나무인지 특정하기는 어렵다.


잎갈나무 (2021. 10. 23 치악산 상원사)


마침 금강산의 계수나무는 ‘잎갈나무’라는 사실을 밝힌 논문이 있다고 하여 찾아 읽어보았다.* 정태현의 『조선삼림식물도설』(1943)에 잎갈나무의 강원도 방언으로 ‘계수나무’가 기재되어 있는 등, 여러 문헌 증거로 보아 조선시대에 금강산에서 ‘계수나무’로 불린 나무는 잎갈나무(Larix gmelinli)임이 분명해보였다. 그렇다면 허균도 가을철 금강산 유람길에서 ‘계수나무’로 불리는 나무를 보고 감흥이 일어,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달나라에 자라는 향기 좋은 계수나무’라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시 한편 지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계방산의 ‘계桂’는 무엇일까? 분명 목서 류는 아닐 것이고 잎갈나무도 보이지 않으니, 관용적 표현으로 상상속의 ‘계수나무 꽃향기’를 뜻할 것이다. 그러나 계방산 정상에서 한참 동안 꽃개회나무 향기를 음미하고 나니, 우리 조상들이 바로 이 꽃개회나무 향기 때문에 계방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던 것이다.


꽃개회나무 꽃 (2025.6.29 계방산)


『한국의 나무』에 따르면, 물푸레나무과 수수꽃다리속(Syringa)에 속하는 꽃개회나무(S. wolfii)는 지리산 이북의 산지 능선 및 정상부에 자라는 낙엽 관목이다. 6~7월에 새가지 끝에서 나온 원추형꽃차례에 연한 홍자색 꽃이 모여 달린다. 꽃 모양도 예쁘고 향기도 감미로와 5월의 꽃으로 사랑받는 라일락(lilac)은 꽃개회나무와 같은 속의 나무로 ‘서양수수꽃다리’라고도 불린다. 라일락 보다 한두 달 늦게 피는 꽃개회나무 꽃은, 봄꽃이 다 스러진 여름철에 높은 산 정상에서 라일락 못지 않은 향기를 내 뿜는다. 나에게 계방산은 꽃개회나무 만발한 꽃 덕분에 ‘계수나무 꽃향기’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산이 되었다. <끝>


*공광성, "고전식물명 ‘계수桂樹’에 관한 고찰 A Study on the Classical Plant Name ‘Kesu(桂樹)”, 국학연구 2017, vol., no.33, pp. 553-590 (38 pages).

**페이스북 댓글을 달아주신 여러 선생님의 의견을 바탕으로 추가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표지사진 : 꽃개회나무 (2025.6.29 계방산 정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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