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舜, 목근木槿,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
“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間識字人, 세상에서 지식인 처신이 어렵다”. 내가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의 이 시 구절을 처음 만난 것은 혈기방장血氣方壯 하던 대학 2학년 때였다. 당시 같은 과 친구들이 <계통과소식>이라는 과회지를 발간했는데, 거기에 실린 편집자 이경운군의 단상斷想에서였다. 이 글은 내 심금을 울렸는데, 그 때 이후로 나는 그 글을 쓴 친구 경운이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내 서재 저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그 과회지를 꺼내어 다시 읽어보았다. 좀 길지만 첫 두 문단을 인용한다.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 오리의 가렴주구, 지주의 수탈, 신분제의 모순으로 백성들은 허덕였다. 소위 사대부라는 자들은 詩會나 열어 문장을 겨루고, 宋學의 공론에 몰두하며 부귀영달만 꽤 했다. 성 밖에는 굶는 사람이 지천이나 성 안에서는 가무가 연일 끊기지 않았고, 주육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통치자는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가? 백성이 통치자를 위해 존재하는가>라고 茶山은 절규했다. 그는 세상에 얼굴 디밈을 부끄럽다 여기고 일생을 초개같이 살며 백성의 신음을 듣고 백성의 소리를 전했다. <내학필외저內虐必外著 하이기우민何以欺愚民, 속마음이 잔학하면 드러나는 법, 백성을 어찌 속이리오.>
茶山 같은 이는 소수였다. 실사구시를 외치던 몇몇 유생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朝鮮은 모순을 더욱 악화시켜 종내는 타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나라를 망친 건 누구의 잘못인가? 잘난 사대부들이다. 드센 기세가 일본의 총포 소리에 움츠려 들어 도망가고 힘 없는 백성만 나라 위해 죽창 들고 계속 대항했을 뿐이다. 학문한다는 사대부는 어디로 갔나?
鳥獸哀鳴海岳嚬 새,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니
槿花世界已沉淪 무궁화 세상은 이미 망해 버렸네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적을 회고하니
難作人間識字人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힘 없는 자조의 시를 적고 梅泉은 자살했다. 梅泉은 그래도 지조있는 유생이다. 곡학아세 하던 유생은 일본이라는 새로운 주인을 섬겼다. 해방 후, 다시 지식인들의 머리 싸움에서 나라는 둘로 분단되었다. …”
이 절명시에서 황현이 우리나라를 분명하게 근화세계로 표현한 것도 일정 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나는 우리나라 고전에서 근역槿域이 우리나라를 가리킨다는 것을 의심해본 적은 없었다. 무궁화는 <시경> 정풍鄭風의 ‘같은 수레를 탄 여인 (有女同車)’에도 미인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꽃으로 나온다.
有女同車 나와 같은 수레를 탄 여인
顔如舜華 그 얼굴이 무궁화 꽃 같아라.
將翶將翔 왔다 갔다 거닐면,
佩玉瓊琚 아름다운 패옥이 찰랑거리네.
彼美孟姜 저 강씨네 어여쁜 맏딸
洵美且都 정말 아름답고도 고와라.
순舜이 바로 목근木槿으로도 불리우는 무궁화(Hibiscus syriacus L.)이다. 최세진崔世珍(1468~1542)이 1527년 편찬한 <훈몽자회> 화품花品에 “근槿 무궁화근, 속칭 목근화木槿花이다”++ 및 “순舜 무궁화슌”으로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결같이 근槿과 순舜을 무궁화로 보았고, 혼동한 적이 없었다. 내가 자란 산골 동네에도 애국가에 나오는 이 무궁화는 해마다 여름철이면 피고 졌다. 장미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꽃이 귀한 여름철에 피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꽃이다.
최근에 “여생을 나라꽃과 애국가 등 국혼(國魂) … 바로잡기에 바칠 것을 각오로 다산과 백범의 맥을 잇는 실사구시 스마트민족주의 新실학을 추구”한다는 어느 교수가 저술하고, 광복회장이 감수한 무궁화 관련 책이 시중에 나왔다. 이 책의 핵심이, 일본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에 무궁화를 우리나라 전국에 보급하고 우리나라의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인데, 지식인의 곡학아세가 이런 지경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은 사실을 왜곡하여 반일 민족주의에 아첨하고 있는데, 이것이 소위 스마트민족주의라면 그것은 올바른 민족주의가 아닐뿐더러 그런 지식인의 ‘스마트’는 당연히 배격해야 할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일이야 누가 비판하랴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둔갑시키는 것이야 말로 나라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락으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사실에 입각해서 올바른 길을 개척해야 한다.
사회 생활을 수십 년 하면서 외국인과 교류할 기회도 꽤 있어서, 어느 나라나 뛰어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음을 아는 지라,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든지, 단일 민족이라든지 등의 말을 들으면 나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것은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런 관념이 커지면 국수주의나 개방이 아닌 폐쇄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원인 중 하나인 친일 잔재 청산은 아마 대다수 찬성할 것이다. 해방 후 벌써 75년이 흘렀기 때문에 어떻게 청산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을 것이지만,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고 노래하는 것이 친일이니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은 황당할 따름이다. 천학비재이지만 한국고전번역원이 운영하는 <한국고전종합DB>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이전에 쓰인 우리 고전에서 무궁화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무궁화는 일제강점기 훨씬 이전,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재배되어 왔으며 여러 문헌에서 나라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보기로 한다.
우리나라를 ‘근화향槿花鄕’으로 표현한 것은 신라시대 말엽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 당나라에 보낸 표문表文에서 처음 보인다. 발해渤海가 강성해지자 발해는 당나라 조정에 사신의 자리를 배치할 때 신라보다 앞에 있도록 해 달라고 주청했는데, 당나라에서 이를 거절하자 신라에서 표문을 보내어 사례한 글에서이다. 즉, ‘북국이 위에 있도록 허락하지 않은 것을 사례하는 표 (謝不許北國居上表)’에, “만약에 황제 폐하께서 홀로 영단을 내려 신필神筆로 거부하는 비답을 내리시지 않으셨던들 반드시 근화향槿花鄕의 염치와 겸양 정신은 자연히 시들해졌을 것이요, 호시국楛矢國의 독기와 심술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나오는 것이다. 이후 이 내용은 <동문선東文選>에 전재되고,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지봉유설>, 이문재李文載(1615~1689)의 <석동유고石洞遺稿>,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동사강목>, 한치윤韓致奫(1765~1814)의 <해동역사海東繹史>,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 등에 등장하게 된다. 여기에 언급된 학자들은 대부분 실학자나 고증학자로 분류되는 분들이라는 사실을 언급해둔다. 이 근화향槿花鄕과 같은 뜻인 근역槿域은 주로 1800년대 문인들의 글에서 보이는 점이 흥미로운데, 남이익南履翼(1757~1833)의 <초자속편椒蔗續編>, 이장찬李章贊(1794~1860)의 <향은집薌隱集>, 조두순趙斗淳(1796~1870)의 <심암유고心庵遺稿>, 김진수金進洙(1797~1865)의 <연파시초蓮坡詩鈔>, 김영수金永壽(1829~1899)의 <하정집荷亭集>, 이남규李南珪(1855~1907)의 <수당집修堂集> 등 8군데이다.
앞에서 언급한 문헌들은 ‘근화향槿花鄕’과 ‘근역槿域’으로 우리나라를 분명하게 표현한 데 반해, 근화槿花나 목근木槿은 나라를 은유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무궁화 꽃 자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근화槿花나 목근木槿 표현은 고려시대에는 ‘무궁화’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는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과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익재난고益齋亂藁>, 이색李穡(1328~1396)의 <목은시고牧隱文藁> 등 5명의 학자들의 문집에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사가집四佳集>에서 시작하여 조선 말의 학자 허유許愈(1833~1904)의 <후산집后山集>에 이르기까지 약 58명의 글에 보인다.** 주로 유학자들인 조선시대 문인들이 시를 지으며 꽃에 대해 읊은 량으로 보아 이 정도면 적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꾸준히 읊어졌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무궁화’라는 한글 표기도 1527년 간행된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 “槿 무궁화근”, “蕣 무궁화슌”이라고 나오고,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탕액편에 “木槿 무궁화”로 나오고 있다. 이 정도면 무궁화가 우리나라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하면서 ‘무궁화’로 불러온 역사가 깊음을 입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서거정의 ‘석양에 연못 가를 거닐다 (池上晩步)를 감상해본다.
小塘咽咽水鳴陂 작은 연못 물이 방죽에서 졸졸졸 흐르고
細雨扶筇獨立時 가랑비 속에 지팡이 짚고 홀로 섰을 때
籬下槿花開落盡 울타리 밑의 무궁화는 피었다 모두 져버리니
靑山銜晩鳥飛遲 청산은 석양을 머금고 새는 더디 나는구나!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신라말기 이래로 무궁화가 우리나라의 상징이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근화향槿花鄕이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우리나라 상징으로 쓰이다가 이수광, 안정복, 한치윤 등 실학자들이 언급한 후 그 사용이 확산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구한말 나라가 도탄에 빠졌을 때 민족의 단결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1908년에 출판된 윤치호尹致昊(1865~1945)의 찬미가讚美歌 제14번째 노래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후렴으로 들어가고 이것이 애국가가 됨으로써 전 민중들에게 확산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윤치호는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오고 미국에 유학했으며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했고 국권 강탈 후에는 총독 암살계획에 참여한 혐의로 6년 형을 받았다고 하니, 찬미가가 출판되는 당시에는 지일 인사일망정 반민족적인 친일 인사는 아니었을 터이다. 더구나 서지학자 안춘근의 ‘애국가원류’***라는 글을 보면, 윤치호의 ‘찬미가’ 이전에 송암松巖 김완규金完圭(1877~1949)가 쓴 애국가도 있는데, 여기에도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표현이 있고, 1904년에 김수원金壽垣이 쓴 순한문체 애국가에도 ‘무궁화삼천리화려강산無窮花三千里華麗江山’이 있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연대가 훨씬 앞선 것으로는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의 시에 “박달나무와 무궁화가 삼천리에, 척토라도 가리지 않고 자라고 있구나 (檀木槿花三千里 不階尺土奄有之)”라는 표현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애국가 가사는 윤치호 개인의 창작이라기 보다는 당시 여러 사람의 표현을 편집한 것일 가능성을 말해 준다. 진실로 지식인 처신이 어렵지 않은 때가 없겠지만, 요즘 같이 시대 변화가 빠르고 복합적인 위기가 닥쳤을 때일수록 지식인은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될 것이다.
<2020.8.30 끝>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 이유출판, 2023, pp.153~161. 초고>
*向非皇帝陛下英襟獨斷 神筆橫批 則必槿花鄕廉讓自沈 楛矢國毒痡愈盛 – 孤雲集, 謝不許北國居上表
** 근화槿花나 목근木槿이 나오는 문헌은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익재난고益齋亂藁>, 이색李穡(1328~1396)의 <목은시고牧隱文藁>, 성석린成石璘(1338~1423)의 <독곡집獨谷集>, 조준趙浚(1346~1405)의 <송당집松堂集>. 조선시대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사가집四佳集>, 성현成俔(1439~1504)의 <허백당집虛白堂集>, 소세양蘇世讓(1486~1562)의 <양곡집陽谷集>, 정유길鄭惟吉(1515~1588)의 <임당유고林塘遺稿>, 유홍兪泓(1524~1594)의 <송당집松塘集>, 구봉령具鳳齡(1526~1586)의 <백담집栢潭集>, 권호문權好文(1532~1587)의 <송암집松巖集>, 이상의李尙毅(1560~1624)의 <소릉집少陵集>, 허균許筠(1569~1618)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동악집東岳集>, 조익趙翼(1579~1655)의 <포저집浦渚集>, 장유張維(1587~1638)의 <계곡집谿谷集>, 이유태李惟泰(1607~1684)의 <초려집草廬集>, 신유申濡(1610~1665)의 <죽당집竹堂集>, 이문재李文載(1615~1689)의 <석동유고石洞遺稿>, 이지걸李志傑(1632~1702)의 <금호집琴湖集>, 이서우李瑞雨(1633~1709)의 <송파집松坡集>, 홍만선洪萬選(1643~1715)의 <산림경제>, 김창업金昌業(1658~1721)의 <노가재집老稼齋集>, 김하구金夏九(1676~1762)의 <추암집楸菴集>, 이희지李喜之(1681~1722)의 <응재집凝齋集>, 신유한申維翰(1681~1752)의 <청천집靑泉集>, 이익李瀷(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채지홍蔡之洪(1683~1741)의 <봉암집鳳巖集>, 심육沈錥(1685~1753)의 <저촌유고樗村遺稿>, 권만權萬(1688~1749)의 <강좌집江左集>, 남극관南克寬(1689~1714)의 <몽예집夢囈集>, 최성대崔成大(1691~1762)의 <두기시집杜機詩集>, 송능상宋能相(1710~1758)의 <운평집雲坪集>,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순암집順菴集>, 이헌경李獻慶(1719~1791)의 <간옹집艮翁集>, 홍양호洪良浩(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 조술도趙述道(1729~1803)의 <만곡집晩谷集>, 김양근金養根(1734~1799)의 <동야집東埜集>, 김상진金相進(1736~1811)의 <탁계집濯溪集>, 범경문范慶文(1738~1801)의 <검암산인시집儉巖山人詩集>, 정위鄭煒(1740~1811)의 <지애집芝厓集>, 이덕무(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장혼張混(1759~1828)의 <이이엄집而已广集>, 남공철南公轍(1760~1840)의 <금릉집金陵集>, 성해응成海應(1760~1839)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다산시문선茶山詩文集>, 김려金鑢(1766~1821)의 <담정유고藫庭遺藁>, 강준흠姜浚欽(1768~1833)의 <삼명시집三溟詩集>, 신위申緯(1769~1845)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강이천姜彝天(1769~1801)의 <중암고重菴稿>,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낙하생집洛下生集>, 박윤묵朴允默(1771~1849)의 <존재집存齋集>, 이재의李載毅(1772~1839)의 <문산집文山集>, 이한응李漢膺(1778~1864)의 <경암집敬菴集>, 강헌규姜獻奎(1797~1860)의 <농려집農廬集>, 김진수金進洙(1797~1865)의 <벽로집碧蘆集> 및 <연파시초蓮坡詩鈔>, 홍한주洪翰周(1798~1868)의 <해옹고海翁藁>, 조면호趙冕鎬(1803~1887)의 <옥수집玉垂集>,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가오고략嘉梧藁略>, 강위姜瑋(1820~1884)의 <고환당수초古歡堂收艸>, 허유許愈(1833~1904)의 <후산집后山集>, 이기李沂(1848~1909)의 <이해학유서李海鶴遺書>.
*** 安春根, 韓國古書評釋, 同和出版公社, 1986. pp.188~192 “愛國歌源流”
++ <훈몽자회> 화품花品에 “근槿 무궁화근, 속칭 목근화木槿花이다”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훈몽자회> 범례에 의하면 “주석 안에서 속俗이라고 일컬은 것은 중국사람이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혹시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있으면 겸하여 통하게 할 수 있어서 중국의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을 많이 수록했는데, 주석이 번잡해질까 걱정되어 모두 수록하지는 않았다. (註內稱俗者 指漢人之謂也 人或有學漢語者 可使兼通 故多收漢俗稱呼之名也 又恐註繁亦不盡收)”하고 나온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목근화는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 (2023.11.6 추가)
김택영金澤榮(1850~1927)의 무궁화 시에 대해
최근에 페친이신 노교수님께서 중국 남통南通을 여행하시면서, 구한말 중국 남통으로 망명하여 장건張騫(1853~1926)의 주선으로 한묵림인서국翰墨林印書局에서 편집원으로 일하면서 이건창의 명미당집, 황현의 매천집 등 한말 문장가들의 문집을 신식연활자로 출간한 창강 김택영에 대한 이야기를 올려주셨다. 몇 해 전에 명미당집 한권을 우연히 입수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이 중국에서 발간되어 있어서 왜 한말사대가로 불리는 이건창의 문집이 중국에서 발간되었을 까 궁금해한 적이 있었는데, 노교수님의 포스팅은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어서 정말로 흥미롭지만, 조금은 구한말 상황으로 인해 쓸쓸한 마음으로 읽었다.
김택영이 무궁화에 대해 읊은 시가 있다고 하여, 어제는 <한국고전종합DB>에서 김택영의 문집인 <소호당시집>, <소호당문집>, <차수정잡수>등을 검색했으나 찾지 못했다. 김택영은 매천과 친교가 깊고, 매천이 절명시에서 ‘근화세계이침륜槿花世界已沈淪’이라고 읊었으니 김택영도 무궁화에 대해 읊었을 개연성이 있을 텐데, 문집에서 발견하지 못해서 끝내 아쉬웠다. 오늘 퇴근 후, 검색 범위를 넖이고, "金澤榮 槿”을 검색어로 사용하여 드디어 찾을 수 있었다. “누각에 올라 (登樓)’라는 시로, <조선한시朝鮮漢詩> 권21에 실려 있다고 한다. (아직 이 문헌을 제대로는 찾지 못해, 정확한 출전을 밝히지는 못하지만 인터넷으로는 https://zh.wikisource.org/.../%E7%99%BB%E6%A8%93_(%E9%87... 등에서 볼 수 있다.) 기존 번역을 참조하여 다시 번역해본다.
一聲南雁攪愁眠 남쪽 기러기 소리 시름겨워 잠 못 이루고
獨上高樓月滿天 홀로 누각에 오르니 달빛이 밝구나.
十二何時非故國 열두달 어느 때 인들 고국 생각 않으랴,
三千餘里又今年 삼천리 이역 땅에서 또 한 해를 보내네.
弟兄白髮依依裏 아우도 형님도 백발이 성성할텐데
父祖青山歷歷邊 아버지, 할아버지는 푸른 산 모퉁이에 잠들어 계시리.
等待槿花花發日 무궁화 꽃이 활짝 필 날을 기다려
鴨江春水理歸船 압록강 봄 물을 배 타고 돌아가리!
독립이 요원해도, 머나먼 이국 땅에서 독립의 그날을 기다리던 창강滄江의 슬픔과 희망이, 매천의 절명시와 연결되는 듯하여 처연한 느낌이다. 선진국 대열에 접어들었다는 대한민국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한 세기 전, 나라가 망해가던 시절 애국지사들의 심정을 결코 쉽게 헤아리지는 못할 것이다.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의 절명시도 내 친구 이경운 군의 번역으로 다시 한번 읽어본다.
鳥獸哀鳴海岳嚬 새,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니
槿花世界已沉淪 무궁화 세상은 이미 망해 버렸네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적을 회고하니
難作人間識字人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