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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Sep 17. 2021

가을을 알리는 고향 선영先塋의 나무 추楸는?

가래나무와 만주개오동


내가 자란 경북 북부지방의 산골에서는 호두를 추자楸子라고 불렀다. <우리말큰사전>에서 추자를 찾아보면 “(1)=가래, (2)=호두”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고향 마을에는 가래나무는 볼 수 없었다. 대신, 추자나무라고 부르던 호두나무가 밭 이곳 저곳에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추자를 호두로 이해한 것이지만, 추자는 글자 그대로 가래나무(楸)의 열매(子)를 뜻하므로 당연히 ‘가래’를 뜻하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내가 가끔 산책하는 길 가에 가래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덕분에 지금은 호두나무보다 가래나무를 더 자주 보면서 살고 있다. 5월이 되면 치렁치렁 늘어지는 수꽃차례와 꽃대가 하늘을 향해 서서 자주색 암술머리를 총총히 달고 있는 암꽃차례를 감상할 수 있고, 여름부터는 풍성한 열매 송이를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우리가 흔히 가래나무로 이해하는 추楸가 고전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알아본다.


가래나무 (좌) 암꽃차례, 2017.5.5, 성남, (우) 수꽃차례, 2020.5.16 남한산성


굴원의 <초사> 구장九章 편의 애영哀郢에 “높다란 추楸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오고 (望長楸而太息兮)”라는 글귀가 나온다. <중국식물지>에서는 가래나무(Juglans mandshurica Maxim.)를 호도추胡桃楸, 혹은 핵도추核桃楸라고 하는데, 흑룡강, 길림, 요녕遼寧, 하북 및 산서 지방에 분포한다고 했다.  즉, 가래나무는 중국의 남부 지방에는 자라지 않는 나무이다. 그런데, 애영哀郢이라는 글은 굴원이 강남江南 지방으로 귀양을 간 후 9년 뒤에 지은 글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굴원이 강남으로 귀양가서 가래나무를 봤을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개오동 열매, 2021.1.9 의성 - 만주개오동과 같은 속의 나무로 열매가 노끈 뭉치처럼 보인다. 추선楸線이 이를 말할 것이다.


<식물의 한자어원사전>과 <초사식물도감>에서는 추楸를 추수楸樹(Catalpa bungei C. A. Mey.)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나무는 한글추천명이 만주개오동으로 우리나라에는 자생하지 않는 나무이다. 하지만 만주개오동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개오동(Catalpa ovata)과 같은 속의 나무로 그 모습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제 초사에 나오는 추楸가 만주개오동임을 감안하여 애영哀郢의 일부를 감상해 보자.


去故鄕而就遠兮             고향 떠나 먼 곳으로 가니

遵江夏以流亡                장강과 하수를 따라 떠도네

出國門而軫懷兮             도성의 문을 나서니 마음이 아프고

甲之鼂吾以行                갑일의 아침에 나는 장도에 올랐네

發郢都而去閭兮            영도를 출발해 고향 떠나니

荒忽其焉極                   마음은 어수선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楫齊揚以容與兮             사람들 일제히 노를 저으니 배는 천천히 나아가고

哀見君而不再得             더 이상 임금님을 뵐 수 없다는 생각에 슬퍼지네.

望長楸而太息兮             높다란 개오동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오고

涕淫淫其若霰                눈물은 방울방울 흐르네.


개오동 꽃, 2021.7.2 횡성


이 외에도 중국 고전의 추楸는 대부분 만주개오동을 뜻한다. 즉, <장자> 인간세人間世에서, 쓸모 있는 나무는 장수하지 못한다는 일화를 설명하는 단락에, “송나라 형씨荊氏라는 곳에 추楸, 측백나무(柏), 뽕나무(桑)가 잘 자란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의 추楸도 만주개오동이다. <본초강목>에 “추楸나무 잎이 크고 일찍 져서 추楸라고 했다. … 당나라 때 입추立秋에 경사京師에서 추엽楸葉을 팔았다. 부녀자와 아이들이 꽃을 잘라 꽂았는데 가을 뜻을 취한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이 나무는 옛날 중국에서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나무였던 듯하다. <중약대사전>에 약재로 추엽楸葉과 추목피楸木皮가 나오는데, 모두 만주개오동(Catalpa bungei C. A. Mey.)의 잎과 껍질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문헌을 읽을 때에는 상황이 복잡하다. 우선, 1446년 간행된 <훈민정음 해례본> 용자례用字例에 “가래爲楸”라고 하여, 추楸를 한글로 ‘가래’로 표기한 최초의 기록이 보인다. 이를 이어받아, 1527년 <훈몽자회>에서, “楸, 가래츄, 열매를 산핵도(山核桃)라고 한다, 또 당추자(唐楸子)는 핵도(核桃)라고 한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중엽에 추楸를 가래나무로 이해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가래나무 열매 송이, 2017.7.15 성남


그러나 유희의 <물명고>는 “추楸, 잎이 크고 수피가 거칠다. 나무가 행렬로 있으면 곧게 높이 자라서 아낄 만 하다. 동의보감과 시해詩解에서 모두 楸를 ‘가래’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물명에 소홀한 경우가 이같이 많으니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설명하여 가래나무가 아니라고 했다. <동의보감 탕액편>을 살펴보면, 추목피楸木皮를 ‘가래나모겁질’이라고 한글 훈을 달고 있다.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도, 가(檟)를 설명하는 항목에서, “의椅, 재梓, 추楸, 가檟는 한 종류의 나무인데 네 가지 이름으로 다 망라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수사동(垂絲桐)은 곧, 개오동(梓)이다.****”라고 했으므로 정약용도 楸를 개오동의 일종으로 봤고, 이는 옳은 해석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자전석요>에도 “楸 츄, 재梓이다. 노나무추”로 나오고, <한선문신옥편>에도 “楸 노나무 츄”로 나온다. ‘노’는 끈의 옛말이므로 열매가 실처럼 늘어진 나무, 즉 개오동을 뜻하는 듯하다. 민중서림 <한한대자전>에는 “楸 개오동나무추, 능소화과. 노나무”로 보고 있으므로, 대부분의 옥편이 추楸를 개오동 종류로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문헌의 추楸는 만주개오동과 가래나무 중에서 문맥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며, 우리나라에 자라는 나무이거나 열매를 식용하는 의미로 사용한 경우는 대부분 가래나무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옛 문헌에는 조상의 분묘墳墓를 뜻하는 ‘송추松楸’가 가끔 나온다. 흔히 무덤가에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많이 심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무덤 주변에 소나무는 심지만 가래나무를 심지는 않는다. 이 송추松楸는 중국에서 조상의 무덤가에 심는 풍속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 전영錢泳의 <이원총화履園叢話>에서,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추楸(만주개오동)를 심어 풍수의 이익을 누린다”*****고 했다. <제민요술齊民要術>에도 “술術에서 이르기를 ‘서방에 추楸 아홉 그루를 심으면 수명이 늘어나고 온갖 병을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개오동 수형, 2021.7.2 횡성


이런 기록으로 보아, 우리 문헌이라고 하더라도 송추의 추楸는 가래나무가 아닐 것이며, 관용적으로 분묘 주변에 심는 나무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끝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시 한편을 감상해 본다. 아마도 가래를 보고 송추松楸, 즉 고향의 선영을 떠올린 듯 하다.


춘당이 가래를 보내면서 준 시에 차운하다 -春塘饋楸實有詩次韻


凝川西畔撫庭楸            응천 서쪽 가에서 마당의 가래나무를 어루만지니

詩興難禁落子秋            열매 떨어지는 가을이라 시흥이 일어나네.

今日滿槃堆皺殼            오늘 쟁반 가득히 주름진 껍질 쌓여있으니

故園歸思若東流            고향에 돌아가고픈 마음은 동으로 흐르는 물 같구나.


가래나무 (좌) 과피에 쌓인 열매 모양, (우) 과피를 벗긴 열매 모양, 2020.10.2 인제 - 호도와 닮았지만 길쭉하고 끝이 뾰족하다.


<한국의 나무>에 의하면, 가래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주로 지리산 이북의 산지나 계곡에서 자생한다고 한다. 이 나무는 중부지방의 산지에 흔히 자라는 나무라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지난해 10월 초 인제 개인산 계곡을 걷다가 크게 자란 가래나무 고목에서 떨어진 가래를 몇 개 주웠다. 벌레가 파 먹고 있는 가래 열매의 외피를 벗겨내고 씻어서 말렸다. 아직 야생 가래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맛을 보기 위해 호도까기로 껍질을 깨어볼려고 했으나 너무 단단하여 실패했다. 아마도 망치를 써야 할 것 같지만, 그냥 관상용으로 두고 보기로 했다. 가래나무 열매는 호도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호도보다 길쭉하고 끝이 송곳처럼 날카롭다. 이 열매 모양이 가래와 비슷하여 가래나무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2019.2.2 쓰고, 2021년 2월 보완. 권용호 옮김 초사 참조)


*宋有荊氏者 宜楸柏桑 - 장자, 인간세

** 楸葉大而早脫故謂之楸 … 唐時立秋日 京師賣楸葉 婦女兒童 剪花戴之 取秋意也 – 본초강목

***楸, 葉大而皮皵 樹有行列 直聳可愛 東醫及詩解 皆以楸爲가래 我國之疏於 物名類 多如是 可慙也 - 물명고

****椅梓楸檟 一物而四名總之 吾東之垂絲桐 卽梓也 其木正中棺材 故梓棺 - 아언각비

*****築土爲墳 植以松楸 而享風水之利 - 이원총화履園叢話

****** 術曰 西方種楸九根 延年 百病除 - 제민요술齊民要術

+표지사진 - 가래나무 열매, 2020.7.26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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