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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Aug 27. 2021

<화암수록>의 9등급 꽃, 전추사剪秋紗를 찾아서!

동자꽃, 전추라剪秋羅

꽃을 사랑한 조선시대 선비 유박柳璞(1730~1787)이 화훼에 대해 쓴 글을 엮은 <화암수록花菴隨錄>이라는 책이 있다. 정민 교수 등에 의해 2019년에 번역 출간되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으로, 나도 일독했다. 한문으로 된 저서이므로 꽃과 나무 이름이 모두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무슨 식물인지 모르는 낯선 이름도 꽤 있었다. 그 중에서도 ‘화목구등품제花木九等品第’의 9등에 속하는 전추사剪秋紗는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인데, “가을바람이 서늘해져 뭇 꽃들이 시들면 전추사가 능히 잇달아 꽃을 피워서, 서리 내릴 때 피는 국화로 이어지니 아낄 만하다. 봄에 피는 것은 전춘라剪春羅라고 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책 ‘화개월령’에는 7월, 8월, 9월에 꽃이 핀다고 했다. 


동자꽃, 2019.8.4 치악산

전추사剪秋紗와 전춘라剪春羅, ‘가을 비단을 베다’와 ‘봄 비단을 베다’라는 뜻의 이 꽃이 과연 무엇일까? 이 이름은 조선 초기의 저작인 강희안의 <양화소록>에는 나오지 않는데, 조선 후기 문인들의 시에 가끔 등장하고 있었다. 궁금해하던 차에,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 (Florence Hedleston Crane)이 1931년 펴낸 <한국의 들꽃과 전설>에서 ‘젼츈라剪春羅’를 발견했다. 8월에 지리산에서 피는 꽃으로 소개한 것인데, 동자꽃으로 보이는 그림 옆에 ‘젼츈라剪春羅’라고 씌어 있었던 것이다. 김태정의 <우리 꽃 백가지>에도 동자꽃에 대해, “<만선식물>에 의하면 만주 지방과 우리 나라 산과 들에 많이 피었으며 … 한여름이 약간 지난 후에 꽃이 피어 전추라(剪秋羅)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 다른 한 종은 초여름에 맨 먼저 꽃을 피운다 하여 전춘라(剪春羅)라고 불렀다 한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꽃이 동자꽃 종류임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식물명의 유래>에서도 ‘동자꽃’의 다른 이름으로 전하라剪夏羅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동자꽃속의 식물에는 동자꽃(Lychnis cognata Maxim.), 털동자꽃(Lychnis fulgens Fisch.) 등이 있는데, 플로렌스 여사는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동자꽃을 그렸을 것이다.


(좌) 동자꽃, 2018.9.9 금대봉, (우) 동자꽃 열매, 2018.9.8 태백산


이시진의 <본초강목>에도 전춘라翦春羅와 전홍사화翦紅紗花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전춘라翦春羅, 전홍라翦紅羅이다. 전춘라는 2월에 싹이 나서 한 자 정도로 자란다. 부드러운 줄기에 푸른 잎이 마주 나며 줄기를 감싼다. 입하入夏에 꽃이 심홍색으로 핀다. 꽃은 동전 크기이며, 꽃 잎 6개가 한 바퀴 돌아가며 잘라서 만든 것 같아 사랑스럽다. 콩 같은 크기의 열매가 맺히는데 안에는 자잘한 씨앗이 있다. 인가에서 즐기기 위해 많이 심는다. 또, 전홍사화翦紅紗花가 있다. 줄기 크기는 세 자이고 잎은 선복旋覆한다. 여름과 가을에 패랭이꽃과 같은 모양의 꽃이 피는데 조금 더 크다. 둘레를 자른 것 같고 선홍색이 사랑스럽다. 패랭이꽃 이삭 같은 이삭을 맺는데 그 안에 자잘한 씨앗이 있다.”***  


이 이름을 <중약대사전>에서 살펴보면, 전홍사화剪紅紗花의 이명으로 한궁추漢宮秋와 함께 전추라(Lychnis senno Sieb. et Zucc.)가 나오며, 전하라剪夏羅(Lychnis coronata Thunb)의 이명으로 전춘라가 나온다. 모두 동자꽃(Lychnis)속의 식물이다. <중국식물지>에서도, 동자꽃(Lychnis cognata Maxim.)의 중국명으로 천열전추라淺裂剪秋羅, 전추라剪秋羅가 열거되어 있고, 털동자꽃은 전추라剪秋羅, 대화전추라大花剪秋羅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추정해보면 <화암수록>의 전추사는 전추라를 말하는 듯하고, 전춘라, 전하라와 같은 류의 식물로, 우리나라의 동자꽃이나 털동자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동자꽃을 가리키는 전추사나 전추라, 혹은 전춘라는 조선 전기의 강희안의 <양화소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물명고>나 <광재물보>에는 전추사, 전춘라, 전홍라, 전홍사가 수록되어 있고, 주로 <본초강목> 설명을 인용하고 있다. 특히 전춘라剪春羅에 대해서는 각각 ‘젼츈나꽃’과 ‘젼츄라’라는 한글 이름을 기재하고 있다. 또한 이 꽃은 정조대왕의 <홍재전서>나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문곡집文谷集>, 박제가朴齊家(1750~1805)의 <정유각문집貞蕤閣文集>, 심상규沈象奎(1766~1838)의 <두실존고斗室存稿>, 신위申緯(1769~1845)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등, 조선 후기 학자들의 시에도 가끔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 몇 수를 감상해보자. 먼저 정조대왕이 지은 ‘동자꽃 (剪秋羅)’을 읽어본다.


燕京中貴家        연경의 부귀한 집에는

家家剪秋羅        집집마다 동자꽃이 있다네 

雖合裁衣裳        의상을 재단 하기엔 알맞다 해도

紅兜奈爾何        붉은 모자*를 네가 어찌 하리!


제2구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집집마다 가을 비단을 마름질하네’가 되고, 동자꽃이 있다는 것과 비단으로 옷을 짓는다는 것이 중의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셈이다. 붉은 모자, 즉 홍도紅兜는 동자꽃의 붉은 꽃잎을 가리키는 듯한데, 청나라 조정의 관리들이 조정에서 쓰는 모자를 뜻하기도 한다. 이 시의 내용으로 보면, 전추라는 연경의 대갓집에서 아끼는 것을 사신들이 전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정원에 기르기 시작한 꽃일 수도 있다. 


猩紅霞暈倩誰裁   노을 빛 붉은 꽃잎, 누가 예쁘게 마름질했나

剛待天孫送巧來  천손天孫이 보내준 바느질 솜씨 기다렸네.  

回笑封姨無此妙  가소로운 봉이封姨는 이렇게 묘한 재주 없으리니,              

輕容片片剪刀催   사뿐한 그 모습은 조각마다 가위로 잘랐네.


심상규沈象奎(1766~1838)의 <두실존고斗室存稿>에 나오는 ‘동자꽃 (剪秋羅)’이다. 둘째 구의 천손天孫은 천제天帝의 손녀인 직녀성織女星을 가리키고,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는 칠석날 처녀들이 바느질 잘 하기를 비는 것을 걸교乞巧라고 한다. 그러므로 첫 두 구절은 직녀가 준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가을 비단을 재단하여 동자꽃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봉이封姨는 봉십팔이封十八姨라고도 하는 바람의 여신으로, 사나운 바람을 일으켜 꽃을 꺽기도 한다. 칠석 무렵이면 보통 동자꽃이 처음 피는 시기이기도 한데, 이 시도, ‘가을 비단을 자른다 (剪秋羅)’는 꽃 이름이 가지는 뜻을 소재로 썼다. 마지막으로 신위申緯(1769~1845)가 지은 ‘동자꽃, 일명 한궁추색 (剪秋羅, 一名漢宮秋色)’을 감상한다. 


名花狎玩近書臺   독서대 가까이서 즐겨 이름난 꽃을 감상하니,

誰費風刀剪刻才   누가 힘들여 바람 칼로 잘라 조각 했는가?

散揷枝頭剛一尺   띄엄띄엄 자란 가지 끝은 한 자 길이인데

飛來蝶翅匝三回   날아 든 나비는 세 번 돌며 나풀대네. 

秋羅不比春羅膩   가을 비단은 봄 비단에 비할 수 없다 해도

盆景何如野景開   화분 모양이 들에 핀 경치에 비해 어떠하던가?

到汝詩情尖峭得   너를 보며 솟아난 시정詩情이 있으니,

停毫記賦漢宮陪   붓 멈추고 한궁추漢宮秋라는 부賦를 떠올린다.


동자꽃, 2022.7.22 청태산


한궁추漢宮秋는 전추라의 이명이며, 중국 전한 시대 원제元帝의 후궁인 왕소군王昭君을 소재로 한 원나라의 대표적 잡극雜劇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작년 8월 초에 치악산에서 동자꽃을 감상했다. 올해도 8월 중순에 백담사 뒤뜰에서 동자꽃을 만났다. 가만히 붉은 꽃잎을 바라보니, 옛 사람들이 누군가 가위로 붉은 가을 비단을 예쁘게 오려서 만들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옛 시인들이 전추라剪秋羅라는 이름을 소재로 시를 읊은 뜻이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동자꽃이라는 우리 이름도 어여쁘다. 유박은 <화암수록>의 ‘화품평론花品評論’에서 전추사剪秋紗에 대해, “응문동자應門童子”, 즉 “문간에서 심부름하는 동자”라고 했는데, 혹시 동자꽃이라는 이름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끝>

* 剪秋紗. 抽風已高 群芳衰歇 剪秋紗 能接續開花以繼霜菊 可愛春開者謂剪春羅 – 화암수록. (정민 번역본에는 “가을바람이 서늘해져 뭇 꽃들이 시들면 전추사가 능히 잇달아 꽃을 피워 국화를 이으니 아낄 만하다”고 번역하여, 전추사가 국화 다음에 피는 것으로 오인할 수 있게 해석되어 있다. 하지만 같은 책의 화개월령에 의하면, 전추사는 7월, 8월, 9월에 핀다고 되어 있고, 여러 국화 품종은 모두 9월, 10월에 핀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문장은 서리 내릴 때 피는 국화로 이어지니로 해석하여 전추사가 핀 다음에 국화가 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2008년, 최양식 옮김으로 간행된 <한국의 들꽃과 전설>은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 (Florence Hedleston Crane) 여사가 1931년 펴낸 <Flowers and Folk-lore from far Korea>를 번역 해석한 책이다. 플로렌스 여사는 전라남도 순천 지역에서 본 꽃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젼츈라剪春羅에 대해서는 영어명 ‘Fire Pink’로 지리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동자꽃일 것이다. 

*** 翦春羅. 翦紅羅 … 二月生苗 高尺餘 柔莖綠葉 葉對生抱莖 入夏開花深紅色 花大如錢 凡六出 周廻如翦成可愛 結實大如豆 內有細子 人家多種之爲玩 又有翦紅紗花 莖高三尺 葉旋覆 夏秋開花 狀如石竹花而稍大 四圍如翦 鮮紅可愛 結穗亦如石竹穗 中有細子 – 본초강목

+표지사진 - 동자꽃, 2019.8.4 치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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