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꽃, 전추라剪秋羅
꽃을 사랑한 조선시대 선비 유박柳璞(1730~1787)이 화훼에 대해 쓴 글을 엮은 <화암수록花菴隨錄>이라는 책이 있다. 정민 교수 등에 의해 2019년에 번역 출간되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으로, 나도 일독했다. 한문으로 된 저서이므로 꽃과 나무 이름이 모두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무슨 식물인지 모르는 낯선 이름도 꽤 있었다. 그 중에서도 ‘화목구등품제花木九等品第’의 9등에 속하는 전추사剪秋紗는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인데, “가을바람이 서늘해져 뭇 꽃들이 시들면 전추사가 능히 잇달아 꽃을 피워서, 서리 내릴 때 피는 국화로 이어지니 아낄 만하다. 봄에 피는 것은 전춘라剪春羅라고 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책 ‘화개월령’에는 7월, 8월, 9월에 꽃이 핀다고 했다.
전추사剪秋紗와 전춘라剪春羅, ‘가을 비단을 베다’와 ‘봄 비단을 베다’라는 뜻의 이 꽃이 과연 무엇일까? 이 이름은 조선 초기의 저작인 강희안의 <양화소록>에는 나오지 않는데, 조선 후기 문인들의 시에 가끔 등장하고 있었다. 궁금해하던 차에,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 (Florence Hedleston Crane)이 1931년 펴낸 <한국의 들꽃과 전설>에서 ‘젼츈라剪春羅’를 발견했다. 8월에 지리산에서 피는 꽃으로 소개한 것인데, 동자꽃으로 보이는 그림 옆에 ‘젼츈라剪春羅’라고 씌어 있었던 것이다. 김태정의 <우리 꽃 백가지>에도 동자꽃에 대해, “<만선식물>에 의하면 만주 지방과 우리 나라 산과 들에 많이 피었으며 … 한여름이 약간 지난 후에 꽃이 피어 전추라(剪秋羅)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 다른 한 종은 초여름에 맨 먼저 꽃을 피운다 하여 전춘라(剪春羅)라고 불렀다 한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꽃이 동자꽃 종류임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식물명의 유래>에서도 ‘동자꽃’의 다른 이름으로 전하라剪夏羅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동자꽃속의 식물에는 동자꽃(Lychnis cognata Maxim.), 털동자꽃(Lychnis fulgens Fisch.) 등이 있는데, 플로렌스 여사는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동자꽃을 그렸을 것이다.
이시진의 <본초강목>에도 전춘라翦春羅와 전홍사화翦紅紗花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전춘라翦春羅, 전홍라翦紅羅이다. 전춘라는 2월에 싹이 나서 한 자 정도로 자란다. 부드러운 줄기에 푸른 잎이 마주 나며 줄기를 감싼다. 입하入夏에 꽃이 심홍색으로 핀다. 꽃은 동전 크기이며, 꽃 잎 6개가 한 바퀴 돌아가며 잘라서 만든 것 같아 사랑스럽다. 콩 같은 크기의 열매가 맺히는데 안에는 자잘한 씨앗이 있다. 인가에서 즐기기 위해 많이 심는다. 또, 전홍사화翦紅紗花가 있다. 줄기 크기는 세 자이고 잎은 선복旋覆한다. 여름과 가을에 패랭이꽃과 같은 모양의 꽃이 피는데 조금 더 크다. 둘레를 자른 것 같고 선홍색이 사랑스럽다. 패랭이꽃 이삭 같은 이삭을 맺는데 그 안에 자잘한 씨앗이 있다.”***
이 이름을 <중약대사전>에서 살펴보면, 전홍사화剪紅紗花의 이명으로 한궁추漢宮秋와 함께 전추라(Lychnis senno Sieb. et Zucc.)가 나오며, 전하라剪夏羅(Lychnis coronata Thunb)의 이명으로 전춘라가 나온다. 모두 동자꽃(Lychnis)속의 식물이다. <중국식물지>에서도, 동자꽃(Lychnis cognata Maxim.)의 중국명으로 천열전추라淺裂剪秋羅, 전추라剪秋羅가 열거되어 있고, 털동자꽃은 전추라剪秋羅, 대화전추라大花剪秋羅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추정해보면 <화암수록>의 전추사는 전추라를 말하는 듯하고, 전춘라, 전하라와 같은 류의 식물로, 우리나라의 동자꽃이나 털동자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동자꽃을 가리키는 전추사나 전추라, 혹은 전춘라는 조선 전기의 강희안의 <양화소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물명고>나 <광재물보>에는 전추사, 전춘라, 전홍라, 전홍사가 수록되어 있고, 주로 <본초강목> 설명을 인용하고 있다. 특히 전춘라剪春羅에 대해서는 각각 ‘젼츈나꽃’과 ‘젼츄라’라는 한글 이름을 기재하고 있다. 또한 이 꽃은 정조대왕의 <홍재전서>나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문곡집文谷集>, 박제가朴齊家(1750~1805)의 <정유각문집貞蕤閣文集>, 심상규沈象奎(1766~1838)의 <두실존고斗室存稿>, 신위申緯(1769~1845)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등, 조선 후기 학자들의 시에도 가끔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 몇 수를 감상해보자. 먼저 정조대왕이 지은 ‘동자꽃 (剪秋羅)’을 읽어본다.
燕京中貴家 연경의 부귀한 집에는
家家剪秋羅 집집마다 동자꽃이 있다네
雖合裁衣裳 의상을 재단 하기엔 알맞다 해도
紅兜奈爾何 붉은 모자*를 네가 어찌 하리!
제2구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집집마다 가을 비단을 마름질하네’가 되고, 동자꽃이 있다는 것과 비단으로 옷을 짓는다는 것이 중의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셈이다. 붉은 모자, 즉 홍도紅兜는 동자꽃의 붉은 꽃잎을 가리키는 듯한데, 청나라 조정의 관리들이 조정에서 쓰는 모자를 뜻하기도 한다. 이 시의 내용으로 보면, 전추라는 연경의 대갓집에서 아끼는 것을 사신들이 전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정원에 기르기 시작한 꽃일 수도 있다.
猩紅霞暈倩誰裁 노을 빛 붉은 꽃잎, 누가 예쁘게 마름질했나
剛待天孫送巧來 천손天孫이 보내준 바느질 솜씨 기다렸네.
回笑封姨無此妙 가소로운 봉이封姨는 이렇게 묘한 재주 없으리니,
輕容片片剪刀催 사뿐한 그 모습은 조각마다 가위로 잘랐네.
심상규沈象奎(1766~1838)의 <두실존고斗室存稿>에 나오는 ‘동자꽃 (剪秋羅)’이다. 둘째 구의 천손天孫은 천제天帝의 손녀인 직녀성織女星을 가리키고,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는 칠석날 처녀들이 바느질 잘 하기를 비는 것을 걸교乞巧라고 한다. 그러므로 첫 두 구절은 직녀가 준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가을 비단을 재단하여 동자꽃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봉이封姨는 봉십팔이封十八姨라고도 하는 바람의 여신으로, 사나운 바람을 일으켜 꽃을 꺽기도 한다. 칠석 무렵이면 보통 동자꽃이 처음 피는 시기이기도 한데, 이 시도, ‘가을 비단을 자른다 (剪秋羅)’는 꽃 이름이 가지는 뜻을 소재로 썼다. 마지막으로 신위申緯(1769~1845)가 지은 ‘동자꽃, 일명 한궁추색 (剪秋羅, 一名漢宮秋色)’을 감상한다.
名花狎玩近書臺 독서대 가까이서 즐겨 이름난 꽃을 감상하니,
誰費風刀剪刻才 누가 힘들여 바람 칼로 잘라 조각 했는가?
散揷枝頭剛一尺 띄엄띄엄 자란 가지 끝은 한 자 길이인데
飛來蝶翅匝三回 날아 든 나비는 세 번 돌며 나풀대네.
秋羅不比春羅膩 가을 비단은 봄 비단에 비할 수 없다 해도
盆景何如野景開 화분 모양이 들에 핀 경치에 비해 어떠하던가?
到汝詩情尖峭得 너를 보며 솟아난 시정詩情이 있으니,
停毫記賦漢宮陪 붓 멈추고 한궁추漢宮秋라는 부賦를 떠올린다.
한궁추漢宮秋는 전추라의 이명이며, 중국 전한 시대 원제元帝의 후궁인 왕소군王昭君을 소재로 한 원나라의 대표적 잡극雜劇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작년 8월 초에 치악산에서 동자꽃을 감상했다. 올해도 8월 중순에 백담사 뒤뜰에서 동자꽃을 만났다. 가만히 붉은 꽃잎을 바라보니, 옛 사람들이 누군가 가위로 붉은 가을 비단을 예쁘게 오려서 만들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옛 시인들이 전추라剪秋羅라는 이름을 소재로 시를 읊은 뜻이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동자꽃이라는 우리 이름도 어여쁘다. 유박은 <화암수록>의 ‘화품평론花品評論’에서 전추사剪秋紗에 대해, “응문동자應門童子”, 즉 “문간에서 심부름하는 동자”라고 했는데, 혹시 동자꽃이라는 이름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끝>
* 剪秋紗. 抽風已高 群芳衰歇 剪秋紗 能接續開花以繼霜菊 可愛春開者謂剪春羅 – 화암수록. (정민 번역본에는 “가을바람이 서늘해져 뭇 꽃들이 시들면 전추사가 능히 잇달아 꽃을 피워 국화를 이으니 아낄 만하다”고 번역하여, 전추사가 국화 다음에 피는 것으로 오인할 수 있게 해석되어 있다. 하지만 같은 책의 화개월령에 의하면, 전추사는 7월, 8월, 9월에 핀다고 되어 있고, 여러 국화 품종은 모두 9월, 10월에 핀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문장은 “서리 내릴 때 피는 국화로 이어지니”로 해석하여 전추사가 핀 다음에 국화가 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2008년, 최양식 옮김으로 간행된 <한국의 들꽃과 전설>은 플로렌스 헤들스톤 크레인 (Florence Hedleston Crane) 여사가 1931년 펴낸 <Flowers and Folk-lore from far Korea>를 번역 해석한 책이다. 플로렌스 여사는 전라남도 순천 지역에서 본 꽃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젼츈라剪春羅에 대해서는 영어명 ‘Fire Pink’로 지리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동자꽃일 것이다.
*** 翦春羅. 翦紅羅 … 二月生苗 高尺餘 柔莖綠葉 葉對生抱莖 入夏開花深紅色 花大如錢 凡六出 周廻如翦成可愛 結實大如豆 內有細子 人家多種之爲玩 又有翦紅紗花 莖高三尺 葉旋覆 夏秋開花 狀如石竹花而稍大 四圍如翦 鮮紅可愛 結穗亦如石竹穗 中有細子 – 본초강목
+표지사진 - 동자꽃, 2019.8.4 치악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