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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일 Mar 26. 2024

창문 없는 방

낙인

이사집을 구하러 다니며 온몸에 한기가 박혀 덜덜 떨곤 했었는데, 갑작스레 수술하고 치료받는 날들이 뒤엉켜 지내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여름이었다. 


방사치료는 쉬다. 주말을 제외한 주 5일, 33일 동안 매일 오전 8시 15분에 가서 기계에 잠시 누워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됐다. 방사 시작 전날 몸에 '설계'를 하기 위해 CT실로 갔다. 수술부위에 유착이 있어 아직 팔이 다 펴지지 않았는데, 막상 기계 아래 누우니 팔이 쭉 위로 올라가며 만세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그러곤, 몇 달 내내 어깨가 아팠다). 방사 담당자 셋이 내 벗은 윗도리를 내려보며, 네임펜으로 죽죽 몸에 선을 그렸다.


'에반게리온'


생각보다 촘촘하게 상체를 뒤덮은 곡선들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뜬금없이 떠오른 '에반게리온'에 나를 겹쳐 생각하니 왠지 흡족했다. 더위에 두 달 가까이 안 지워지게 하려면 어찌해야 할런지 금 걱정이었지만.


"방사치료 시작할 때까지 절대 지워지면 안 돼요. 샤워하지 마시고, 속옷 입지 마세요. 첫날은 문신작업해야 하니까 예약시간보다 30분 일찍 오시고요."


"문신이요?"


"방사설계한 선 따라 점으로 문신을 할 거예요. 그럼 다음 날부터 샤워 가능하세요"


"문신, 지워지나요?"


"아뇨. 문신인데요."


설명간호사는 별스런 질문을 다한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서른여섯, 서른일곱...'


그들은 만세자세로 누운 나를 내려다보며 쿡쿡 문신을 찍었고,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는 일에 몰두했다. 약간 따끔한 정도라 통증이 문제 되지는 않았지만, 언제 어느 부위를 찍을예측할 수가 없어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매번 몸을 움찔거리게 되었다.


"야, 여기 덜 찍었잖아. 여기 몇 개 더 찍고, 그리고 여기. 넌 이게 보이냐? 몇 개 더 찍어"


방사담당자가 후배를 혼내고 돌아갔고, 이내 그녀는 지시대로 더욱 꼼꼼히 문신을 찍어댔다. 그 손길이 너무나 빠르고 거칠어져서 숫자를 자꾸만 놓쳤다. 계속 숫자를 세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조금이라도 덜 새기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하나'씩 헤아린들  이곳에선 '몇 개'로 이야기되는데.




치료가 누적되며 체중이 줄었고, 땀이 비 오듯 나며 자주 어지러웠다. 호중구 수치가 바닥을 찍었고, 여기저기 발진이 났다. 벌겋게 변했던 가슴은 어느새 진물이 흐르 벗겨저 옷이 스치기만 해도 쓰라렸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 그다지 상하지 않았다. 지금을 견디면 어차피 지나가고 회복될 일, 문제가 되지 않다.


문제는 그 방, 방사선실이었다. 그곳에 누우면 밟아둔 기억들이 따닥따닥 튀어나와 처를 입혔다. 


"솔직히 유방암은 병도 아니지."

"그래서 몇 기인데? 처음 증상 좀 자세히 말해봐."

"네가 지금  타령할 때니? 그냥 쉬어."

"유방암인  얼마나 다행이니. 감사해야 해. "


나 또한 누군가에게 했을 법한 그런 말들. 딱히 악의도 없고, 별 일 아니라고 다독이며 치료에 집중하길 바라는 말들. 그럼에도, 자꾸만 내 안에서 덜그럭 대며 처를 냈다.


병도 아니라면서, 왜 그토록 불안해하며 전조증상을 알고 싶어 하는 걸까? 이전까지 누렸던 열망과 채움은 이제 나를 떠나갔다고 말하면서, 왜 내 삶 행운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는 걸까? 모든 말이 앞 뒤가 맞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병원도, 사람들도 나를 전보다 험하게 다루고 있었다. 내진을 하거나 주사를 놓기 전 몇 번이고 처치 방법을 설명해 주며 혹시 불편한 곳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던 이들이 이제는 시작한다 말도 없이 푹푹 찌르고 휘저어 놓는다. 내 벗은 몸 위에서 자기들끼리 적나라하게 군기를 잡고, 편의를 위해 내 몸에 문신을 새긴다. 직장에서 극성맞게 일할 때면 종종 달려와 밥을 사주며 응원해 주던 이들이, 이제카톡으로 감사를 강요한다. 이제 나는 살아만 있어도 감사해야 하는 암환자니까, 그렇게 대해도 된다고 촘촘하게 낙인을 새겨두었으니까.




같은 병실에 입원했던 전라도 여사님은 항암을 마치고 더 이상 걷지 못하셨다. 휠체어에 의지해 방사치료실에 오셔서는 내 손을 잡고 울기만 했다. 


"지나고 나면 다 괜찮아지실 거예요. 힘내세요."


나는 성의 없는 거짓말을 집어던지고 뒤돌아섰다. 이제 막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공포에 사로잡힌 그녀에게. 내게 다정한 구원을 건네었던 그녀에게.......


그러고는 곳, 창문 없는 방에 겨져 누워있다. 예전의 삶이 머물던 자리는 빈 의자만 남았고, 그마저도 삭은 관절들을 부러뜨리주저앉았다. 이제 나는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이사 온 집에 또다시 누수가 시작되었다. 감사는 마음은 그렇게 쉽게 어나오도록 말랑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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