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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의 호주 워킹홀리데이,
농장과 공장 잡을 끝내고.

우당탕탕 세컨비자 따기 위한 여정.

by 이채이 Mar 26. 2025

 호주에 온 지 벌써 6개월.

만 31살로 넘어가는 생일 이틀 남겨두고, 지금 막 세컨비자 신청을 했다.

말 그대로 얼마나 우당탕탕이였는지... 생각만해도 헛웃음이 나온다.

지금은 승인을 기다리는 상태.


만약 워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왔더라면, 멘탈이 탈탈탈탈 털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장 내일도 안심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 뉴사우스 웨일즈 콥스하버에서의 블루베리 농장 3주 



세컨비자 따기 위해 블루베리 농장 가서 3주 정도 일하다가 정당한 급여를 받을 수 없어서 그만뒀다.

따는 만큼 돈을 벌어가는 Peace rate의 형태다.

말이 3주지, 비가 오는 날은 일을 하지 못해서 일주일 정도는 일을 못했다.

그러면, 돈을 버는 형태가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돈에서 마이너스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물론 탑피커(Top peacker:제일 많이 수확한 사람)들은 주 1000불도 벌기는 했지만,

나는 그렇게 잘 따는 편도 아니였고, 의욕이 나질 않았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본 결과, 그만두고 다른 곳을 알아보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살았던 된 친구들은 너무 좋았다. 

다양한 국가의 친구들과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요리도 함께 해먹으면서 다양한 문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을 어쩔 수 없었다.




2. 다시 브리즈번으로 돌아와 잡 구하기


 백팩커스 잡보드라는 구직사이트에서 포크리프트 구직을 봤다. 세컨비자도 가능한 지역이라고 한다.

오자마자 포크리프트 자격증을 따놓은 터라 바로 지원할 수 있었고, 운 좋게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퀸즐랜드 보웬이라는 곳에 있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보웬으로 넘어갔다.




3. 보웬 NQ fresh 에서의 4주. 그리고 해고.

 오자마자 숙소가 아닌, HR 컨트랙터(회사와 구직자를 연결해주는 사람) 집에서 2주일간 머물게 되었다. 

처음부터 숙소에 들어간 걸로 알고 있었다. (영어를 못 알아 들어서 컨트랙터 집이라는 걸 뒤늦게 앎.)

숙소라고 하기엔 집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숙소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나는, 들어간 첫날, 저녁까지도 다른 룸메이트가 오지 않아 불안해 했다. 내일 당장 '나 어디 잡혀가는거 아냐? 숙소 왜 이렇게 좋아.'라며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었다. 그러면서 여차하면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짐도 풀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웃기네.



                                                실수가 중요한 게 아니야. 실수 하고 난 후
                                           어떤 태도와 행동으로 대처하는 지가 중요한 거야.



처음 3일 정도는 포크리프트를 몰았다. 일하던 도중, 슈퍼바이저가 어떤 남자를 데리고 오더니 나보고 내리라고 했다. 나는 어리둥절 했지만, 일단 내렸다.

나보고 포크리프트 운전 못하는 것 같다. 과일 선별 및 패킹 작업을 하라고 했다.

화끈해진 얼굴을 가지고 패킹 작업 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포크리프트 운전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로부터 '멋지다, 운전 잘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이런 해고가 더 부끄러웠다.


 포크리프트 자격증을 따고 오랜만에 운전하는거라 조금 많이 떨기도 했고, 빈 트레이를 떨어뜨리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나는 한동안 '실수' 자체 때문에 내가 포크리프트 드라이버를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내가 틀렸다. 실수해도 됐다. 거기 있는 모든 드라이버들이 다 실수했다.


 하지만, 실수하고 난 후의 나의 대처와 태도가 문제였다. 

또 포크리프트를 운전하면서 내 페이스에 맞게 침착하게 하지 않고, 초보처럼 보이지 않고 잘해보이려고 조금 막 몰았었다. 그래서 뚝딱거린 걸 다 들키기도 했다.


하지만, 호주에 온지 1개월 밖에 안됐던 나에게는 여유라는 건 있을 수가 없었다.

'너스레'를 사회생활 하면서 후천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실수 한 후의 상황에서 너스레가 자연스럽게 나오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렇게 그냥 패킹 작업만 했었는데, 다른 한국인 포크리프트 친구가 "언니, 그러고 있지 말고. 한번이라도 더 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해봐" 라는 말에 나는 머리가 띵했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고, 기회는 내가 만드는 거지.

수동적으로 주저앉아 있지 말고, 부탁이라도 해보자."


나는 한 번 더 용기를 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내가 내 안의 나를 크게 만들어놨나 싶다.

그 후로 슈퍼바이저가 나름 나를 트레이닝 시켜주겠다며, 몇 번 씩 포크리프트 운전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기회를 잡은 것이다.

감이라도 익혀놔야겠다 싶었다.

다른 곳에서 포크리프트 드라이버로 일하게 될 때, 그때는 뚝딱거리지 않게 말이다.


하지만, 갈수록 나는 과일 패킹작업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 일로 배운것이 두 가지나 된다.

'실수'가 문제가 아니라 '실수'를 어떻게 대처했는지가 중요하다는 거.

주저 앉아있지 않고 용기를 한 번이라도 더 낸 것.


그렇게 하루 12시간씩 서서 망고, 파프리카, 멜론을 패킹하면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지쳐가는 와중에도 1000불 이상씩 들어오는 걸 보면 힘이 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해고 통지를 받았다.


 처음에는 너무 벙쪘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또 기분이 좋았다.

12시간 동안의 일의 굴레와 불안정적인 쉬프트로부터 벗어나는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해고는 처음 당해보지만, 타의에 의해 해고 당하는게 꼭 기분 나쁜것 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물론 다음 일자리가 너무 막막하기는 했다.




4. 빅토리아 푸옹 육고기 공장에서의 13주

 지금 생각해보면 이 일은 내가 꼭 했어야 하는 운명이였던 것 같다.

패킹공장에서 해고 당하고, 숙소에서 절망적인 나날과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던 와중에

한국 워홀 오픈단톡방에 육고기 공장 여자 2명 구인글을 보게 되었다.

육고기 공장의 악명(힘들기로 유명하다는...)을 하도 들었던 터라 정말 여기 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다.

지원해볼까 하다가.. 말았다.

그리고 다른 일을 계속 알아보고 지원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잡은 구해지지 않았다. 

'며칠 전 그 육고기공장에 지원해볼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다가 그 단톡방에 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여자 1명을 구한다고 떴다.

내가 이 구인글을 발견할 때의 그 타이밍이 너무 이상했다.

'너 여기 지원해야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간을 더 이상 지체 할 수가 없었다. 3개월만 죽어라 일하자. 생각하고 지원했다.

나는 바로 멜버른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육고기 공장에서의 하루하루는 매우 힘들었다.

내가 일했던 곳은 'Offal team'인데 소의 내장을 다듬어서 박스에 넣는 일이였다.

혀, 꼬리, 폐, 혈관 등 다양한 부위의 지방을 제거한다.

15kg이 되는 박스를 하루종일 들고 날라야 할 때도 많다.

3개월 내내 아침마다 손이 구부려지지 않았다. 

손목이 아파서 파스를 붙히고 잠들때도 많았다.

너무 힘들어서 때로는 내 목표를 잊어버리기도 했다.

'호주가 뭐가 좋다고 비자 연장을 하려는 거지? 이렇게까지 하면서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뭐야?'

라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다.

8시간 동안 시뻘건 핏덩이 고기들을 보고 있자니, 그것 자체도 정말 현타가 많이 왔었다.


 하지만, 나는 당장 호주가 좋아서 있으려는 것 보다는

나중에 호주에 더 머무르고 싶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 제한 때문에 나중에 비자 연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도, 죽이는 것도 사람



  이 힘든 곳을, 사람들 덕에 버틸 수 있었다.

일이 끝나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어떤 포지션이든 상관 없이 시간 나면 서로의 일을 도왔다.

"고맙다, 고생했다."이런 좋은 말들이 많이 오고갔다.


 '일은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데, 사람이 힘들면 버틸 수 없다.'

이건, 한국에서만 적용 되는게 아니라 내가 몸 담고 있는 어느 곳에서든 적용 되는 것 같다.

누군가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면 그게 그날 하루의 기분을 정할 때도 많았다. 

그 말로 힘든 하루를 가뿐히 이겨내기도 한다.



글을 일단락하며.. 


 서른에 시작한 이 여정에 나는 많은 내 자아가 부서지고 있다.

내가 고집하고 있던 많은 '나'들이 지워져 가고 있는 걸 느낀다.

나름 스스로 많이 관용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얼마나 편협된 시각을 갖고 있었는지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며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도심 한복판을 걸으면, 정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간다.

모두 다 나이도, 취향도, 생각도, 가고자 하는 방향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선택의 폭이 넓어서 좋기도 하지만, 어떨때는 너무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때마다 내 마음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외부의 어떤 것에도 휩쓸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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