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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해월 Mar 05. 2024

미래를 알아도 울고 싶어요.

제 꿈은 좋은 어른이 되는 것.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당연하게도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분석해 보는 것 또한 나에게 참 도움이 많이 된다. 

 대게로 이런 경우에는 두 가지로 나뉘지 않을까 싶다. 악의를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나는 다행히도 아주 바보 같고 똑똑해서 사람의 의도를 잘 파악하는 편이다. 네게 조언을 해주려다가 선을 넘어버리는 경우에는 '실수구나'하고 넘기고,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에게는 방긋 웃고 귀를 닫는 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사람들, 특히 어른들을 많이 만났다. 일을 할 때, 여행을 할 때, 다양한 상황 속에서 어른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종종 어려운 적도 있었다. 원인은 서로에게 있겠지만, 어른들이 나를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봐주지 않는다는 점이 참 씁쓸했다. 내가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떻게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나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나를 수많은 사회초년생 중 한 명, 자신의 자식과 비슷한 나이대에 청년, 가끔은 조카와 혼동을 하기도 했다. 


 특히 여행에 가서 한국인을 만나면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어른이 많았다. '딸 같아서' '아이 같아서' '내가 너의 부모라면' 그들은 어른의 역할이 조언이라고 믿는 듯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경험 속 후회되는 상황을 골랐고, 나에게는 그렇게 살지 말라며 조언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나는 조언보다도 그저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인 것을 말이다.

 누구는 네게 공부를 하지 말고 즐기라고 말한다. 또 누구는 공부를 안 한 것이 후회된다며 잠을 줄여서라도 좋은 대학을 가라고 말한다. 또 누구는 네게 돈을 모으라고, 또 누군가는 돈을 자신에게 투자하라고, 살을 빼라고, 먹고 싶은 것을 맘 껏 먹으며 즐기라고, 많은 남자들을 만나라고, 정말 신중하게 연애를 시작하라고, 자신의 삶에서 후회되는 이슈들을 떠올리며 네게 조언한다. 이러한 말들을 하는 그들의 두 눈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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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불완전하지만, 불안정하지 않은 사람이다. 특히 지금보다도 10대에는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공동체 사회에서 내가 어떻게 기능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인간은 어떻게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분명하게 선과 악이 구분된 이들을 어떻게 포용할 수 있을지 등등 다양한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또 사회에게 던지며 답을 찾으려 애썼다. 이러한 질문들을 어른들과 나누는 순간들을 꿈꾸기도 했다.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매일 지각하는 학생을 정시에 등교시키기 위해 5시간 동안 토의를 나눴다. 지각을 해서 피해 보는 것은 그 학생뿐이었지만, 그 학생을 위해 공동체원 모두가 고민하고 행동했다. 이러한 교육으로 인해서 나는 개인의 문제를 공동체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도움을 주고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 당시에는 화도 나고 귀찮았지만, 그게 옳다고 믿었다. 

 어찌 보면 오지랖일 수도 있는 회의들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 대게 개인의 문제는 따뜻한 말과 온기가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몇 년간 내 두 눈으로 확인한 결과이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존재한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악한 행동일지라도, 이유가 없는 행동은 없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는 스스로도 이유를 몰라 답답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때 이유를 찾지 않으면, 이 행동은 악습으로 남아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들을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불안정할 때, 솔직한 아이의 상태일 때 원인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대게로 많은 원인은 결핍과 트라우마, 불안인 경우가 많다. 그때는 공동체의 둥근 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가 개인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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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도 불안정하고, 불안하고, 휘청거리며 중심을 못 잡을 때가 있었다. 마치 귀신이 붙은 것처럼 하루종일 죽고 싶다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하고, 칼로 몸에 배어 피를 보지 않으면 불안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죽고 싶다는 마음을 지나쳐 어떻게 해서든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영혼과 정신이 혼잡했다. 나의 불안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너무 잘 살고 싶었던 마음이 문제였다. 내가 잘하고 싶은 것은 학교공부도, 운동도 아닌, 삶 자체였다. 너무 잘 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늘 일상에 벅차도록 많은 일을 했고, 선생님이 칭찬하는 모든 것을 이루려 애썼으며,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길 원했다. 그때는 나를 이유 없이 괴롭히려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해서 괴로웠다. 


 그렇게 혼자서 괴로워하다가 졸업을 앞두고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지금 고민하는 일이 되게 작은 일이라는 생각, 지금 내가 사는 삶이 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의 미래가 상상이 되기도 하고, 어쩌면 내가 신에게 엄청난 상을 받아 과거로 돌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말이다. 내가 세상을 살아야만 하는 다른 목적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종종 이 느낌을 잊어버리다가도, 정말 멘털이 흔들릴 때 다시 한번 그때의 기분을 떠올린다. 내가 오늘 하루 겪은 고통과 자극도 모두 지나고 보면 별 일이 아니란 걸 안다. 안다는 기분이 참 든든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울고 싶은 날은 있다. 


 이 소제목을 꼭 사용하고 싶었다. 인생에는 나아질 것을 알면서도 마음껏 힘듦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분명히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자극인데, 한번 화내고 넘길 문제인데,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고통스럽다. 다시 한번 마음을 잡으려고 "난 미래에서 온 거야. 이 일은 별거 아니야. 다 괜찮아질 거야"하며 중얼거리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나의 가슴이 아려온다. 마음은 이성 따위 이해하지 못해서 자꾸만 혼자 아프곤 한다. 

 나는 작년 2023년에 헬스장에서 계약서 사기를 당한 뒤 일주일 동안 울었다. 받지 못한 금액은 38만 원으로 소액이었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분명 계약을 하기 전부터 느낌이 이상했는데, 이 모든 게 내가 신중하게 계약서를 보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니 서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 경험이 내 삶에 있어서도 좋은 배움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 일이 나를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내가 느끼던 슬픔의 형태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절망이라기에는 절망이 아닌 걸 알고, 슬픔이라기엔 금방 없어질 눈물이라는 것을 아는데, 가슴은 아리고 속은 울렁거리는 게 감정이 이상했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나는 슬퍼보고 싶었다'였다. 성인이 되고 서러운 적은 많았으나, 나는 늘 모든 것을 꾹 참고 눈을 감았다. 회피하고 숨고, 마음으로 숨죽여 울었다. 예민한 기질을 갖고 태어났으나 그런 나를 인정하지 않았고, 평범 = 안전함이라고 믿으며 안전한 삶을 위해 평범을 쫒았다. 나는 특별함을 잃었고, 나를 잃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특별한 마음이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나는 사람을 지독하게 좋아했고 누구에게나 마음을 주었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믿으며 모두와 잘 지내려고 노력했고, 뻔하게 보이는 악한 의도에도 눈을 감고 손을 내어주었다. 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했지만, 스스로에게는 불친절을 넘어 무례했다. 

 헬스장 사기 계약 사건에서도, 나는 그들을 미워할 수 없어 힘들었다. 법적으로는 상대의 잘못이 맞지만, 대화로 부드럽게 해결될 줄 알았고, 그들에게 악한 의도는 없다고 믿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게 싫었고,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는 게 겁났다. 손해를 보더라도 좋은 감정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게 인생이었다. 왜 이렇게 당연한 걸 몰랐을까 싶지만, 나는 정말로 순수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어릴 때부터 좋은 어른이 되는 게 꿈이었다. 놀랍게도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일기장에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적어두었다. 그때는 좋은 어른의 기준을 '아이들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지켜지지 못했으니까, 가장 여리고 순수할 때 악한 마음들과 싸워야 했으니까, 나는 어른이 되어서 약하고 순수한 생명들을 보살피고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나는 성인이 되었지만, 사회적으로 말하는 어른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다른 여리고 어린 생명들을 지키기에는 내 마음이 아직도 여리다. 어릴 때 보다 눈물도 많고, 감춰진 슬픔 창고에는 슬픔들이 가득하다. 어쩌면 내가 진짜 어른인 이유는, 내가 아직 어리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은 나의 결핍이었다. 내가 지키고 치료해야 할 것은 다른 아이들이 아니라 나의 어린 시절인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진정한 어른의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아니, 청춘이라는 타이틀과 조금은 어울리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우선 어린 시절 결핍에서 생긴 이상형과 물욕, 식욕에서 해방되었고,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할 수는 없지만, 나는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지금이 충분히 깨지고 도전할 시기인 것을 알기에 새로운 도전에 있어서 브레이크를 잡지 않게 되었다. 


나는 사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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