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해월 Mar 18. 2024

시간이 흐른다는 게 희망을 주다가도 눈물짓게 만든다.

가족여행 이야기


첫 가족여행

 처음으로 가족여행을 갔다. 우리 가족이 갔던 여행은 늘 친척과 함께, 가족처럼 친한 부모님의 친구들과 함께, 오빠의 친구의 가족과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였다. 그로 인해 어린 시절 "가족여행" 키워드 속에는 외로웠던 마음과 소외되었던 아픔이 숨어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릴 적에도 엄마에게 우리 가족끼리만 여행을 가고 싶다고 졸랐던 적이 있었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인지 늘 거절당했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 경험과 가정환경을 함께 돌아보면, 나는 "여행"에 대한 결핍이 존재하는 것 같다. 어릴 때는 개인적인 트라우마와 불안으로 집을 떠나 잠도 자지 못했고, 그나마 가족과 함께라면 멀리 떠날 수 있었지만, 늘 불편한 사람들과 함께였다. 편안한 사람들과 편안한 여행을 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위 목표를 이루기가 더욱 힘들었기에, 나는 친구와 함께, 혹은 홀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나는 그 여행들을 통해 함께 동행하는 이에 따라서 여행의 경험과 배움, 감정이 크게 달라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를 알아가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네게 이번 가족여행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고작 2박 3일 제주도였지만, 기존 여행과는 다른 뭉클함이 존재했다. 가족끼리 함께 사진을 찍는 것도 5년이 넘은 것 같고, 그 사이에 부모님의 얼굴도 많이 변했고, 영원히 어릴 것만 같던 오빠와 나도 성인이 되었다. 

 엄마는 우울증이 없어졌지만, 불안증으로 비행기를 무서워하고, 아빠는 불 같은 성격이 많이 유해졌지만, 몸이 많이 약해졌다. 어릴 때는 아빠의 불같은 성격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서 유해지길 바랐는데, 그렇다고 아빠가 이렇게 약해지길 바란 건 아니었다. 

 오빠는 철이 들어버렸다. 어릴 때도 밝고 착했고, 지금도 밝고 착하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청년의 고독함이 묻어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나는 많이 단단해졌다. 혼자서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어린 시절 결핍에 묶여있지도 않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나도, 슬픔이 목에 메어져 있는 듯싶다. 


엄마와 나 

 내가 정말 안 고쳐지는 습관이 있다. 바로 거짓말이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네게 학교생활이 어땠냐고 물어봤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유치원 때부터 쭉 일상 속 행복했던 이야기들을 지어내 엄마에게 해주었다. 초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늘 재밌었던 이야기, 행복했던 이야기를 위주로 대화를 채우는 게 습관이었다. 종종 과장을 하기도 했다. 이후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기숙사 생활로 엄마와 대화가 줄었고, 자연스럽게 습관은 고쳐지려고 했지만, 그때 엄마가 네게 매일 감사일기를 써서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그때부터 또다시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밤만 되면 행복한 일들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나의 거짓말의 이유를 찾아보면, 내 행복한 이야기를 통해 엄마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의 예쁜 눈과 숱 많은 머리카락, 독특한 상상력을 물려받았지만, 결코 엄마의 우울증과 불안증은 네게 유전되지 않았다고, 엄마는 불행해도, 엄마는 흔들려도,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고, 나의 괜찮음을 계속 확인시켜주고 싶었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엄마를 닮았기 때문이다. 불안증도, 우울증도, 트라우마도, 엄마의 불안은 나와 닮아있다. 하지만 그 예민함과 어둠이 나를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자극을 준다. 


아빠와 나

 딸과 아빠와의 관계는 딸이 사회적으로 맺는 남성과의 관계에 큰 영향을 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단편적으로 말하자면, 연애를 못 하는 이유 중에서도 아빠처럼 멋있는 사람이 없어서 안 만나는 이유와, 아빠 같은 사람일까 봐 못 만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물론 나는 어느 쪽에든 100% 해당되지는 않는다. 다만,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은 네게 많은 경고를 주었다. 

 나는 어릴 적 아빠의 분노조절장애를 보았다. 아빠가 화가 나면 물건이 부서지고, 엄마의 비명이 들리고, 미안한 일도 아닌데 고개 숙여 사과하는 엄마의 모습이 일상 속에 크게 자리 잡혀있었다. 그로 인해 나는, 모든 남자들이 앞에서는 친절하고 다정해도, 사이가 더 깊어지면 폭력적일 거라는 편견을 가졌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는 강박적으로 폭력적인 사람을 기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경고는 아빠처럼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어느 날 화를 내며 방 안에서 물건을 던지는 날 보았다. 절망스러운 마음에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닮기 싫었던 모습이 네게 있다는 게, 그리고 그 대상이 또 엄마였다는 게, 네게 학습된 폭력의 행동이 너무 끔찍했다. 

 그 외에도 정치 성향 차이로 싸우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아무 곳에서나 돈을 턱턱 쓰는 아빠의 모습, 누구에게나 돈을 쉽게 주는 모습, 자연스럽게 나오는 필터링 없는 가부장제 워딩 등등 많은 것이 나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네게는 "절대 아빠처럼 되지 않아야지"하는 마음이 아주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오만하고 무지했다는 걸, 성인이 되고 자꾸만 반성하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아빠라는 존재를 너무 단면적으로만 바라보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의 장점을 찾는 것은 나의 강점이기도 했는데, 아빠의 장점은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몇 달 전에 부모님의 친구로부터 "너는 엄마의 상상력과 지혜, 그리고 아빠의 리더십과 친화력, 상황 조율 능력을 받았네"라는 말을 들었다. 네게는 아직도 그 워딩이 신선했는지 잊히지 않는다. 아빠에게는 배울 점이 없다고, 닮고 싶은 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듣고 아빠를 조금 풀린 시선으로 바라보니 달라 보였다. 내가 오지랖이라고 지칭했던 행동은 베푸는 마음이었고, 아빠가 화날 때 감정조절을 못 하긴 해도, 평소에는 엄마에게 모든 걸 맞추고, 배려해 준다는 것, 그리고 네게는 늘 사랑을 주어도 부담되고 과하게, 어색하게 주었지만, 그것 또한 서툰 마음이었다는 게 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빠가 대단한 것은 주말을 포함해서 매일매일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힘든 기색을 하지 않는 것,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고 침착하게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모습과 모르는 척하면서도 우리가 하는 모든 비판을 듣고 끊임없이 변화했다는 것. 

 


 


 


이전 03화 미래를 알아도 울고 싶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