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이면서도 낯설지 않도록
영어로 집들이를 housewarming party라고 한다[1]. 처음 이 문구를 듣고는 아직 온기가 깃들지 않은 새 집에 모여 사람들의 온기로 집을 따뜻하게 데운다는 낭만적인 뜻으로 이해했다. 그런 의미에서 7월의 우리 집은 이미 따뜻함을 넘어 오키나와 여름의 열기까지 더해져 뜨거울 지경이었지만, 뒤늦은 housewarming party를 열었다.
[1] 어원을 찾아보니 중앙난방이 없던 시절 말 그대로 빈 집을 따뜻하게 덥히기 위해 사람들이 장작 등을 가져가 데우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오키나와에서 지내는 동안 종종 친구들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는데, 갈 때마다 수준 높은 음식에 놀란 적이 많았다.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외국 친구들이 한국 친구들보다 손님을 집에 초대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대부분 일찍부터 독립해서 ‘내 공간’에 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나라보다 다른 사람에게 집을 보이는 것에 부담이 덜한 연유일 수도 있겠다. 아, 여기서 일본은 예외인 가보다. 일본 친구에게 들은 바로는 집으로 초대하는 일이 흔치 않다고 하던데, 나 역시 일본인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은 없었다.
운이 좋게도 우리 주변에는 요리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국적이 다 다르니 흔히 경험하기 힘든 각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 큰 즐거움이었다. 또 다른 즐거움은 각 집의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반려 식물, 손수 만든 장식품과 미술품, 방 한가운데 놓인 피아노, 직접 만든 가구까지 각자의 개성을 내세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문화가 다르다 보니 집을 꾸미는 형태가 다양해지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전까지 나 스스로 물건을 만든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부분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는 것은, 단순한 친목을 넘어 이러한 다채로운 경험을 주기 때문에 나 역시 한 번쯤은 친구들을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때만 해도 요리 일자무식이었던 나는 집들이를 계획하면서 고민이 많아졌다. 친구들에게 한국음식을 소개하고도 싶었고, 그러면서도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미션을 마음에 한 켠에 품고 백수이자 가정주부의 시작과 함께 요리에 조금씩 도전했다. 다행히 오키나와에서는 한국 식재료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부족한 실력을 인정하고 ‘백설 불고기 소스’를 구해서 불고기를 만들어보니 약속된 ‘맛있는 맛’이 났다. 간단한 레시피 위주로 실습하며-자연스럽게 남편이 주 피험자 또는 심사관이 되어주었다- 드디어 메뉴와 마음의 준비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덧 집을 꾸민 지 4달째인 7월이 되었다.
대표 메뉴로 소불고기, 간장 찜닭을 준비하고, 애청했던 프로그램 '윤식당’의 레시피에 도움을 받아서 김치전을 준비했다. 유부초밥, 샐러드, 카나페 등을 곁들여 내니 한국적이면서도 낯설지 않은 집들이 상이 완성되었다. 친구들 중에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거나, 채식주의자도 있기 때문에 식재료도 꼼꼼히 적어 접시 앞에 세워두었다. 식재료 글씨 옆에 남편이 그린 소와 닭 등의 원재료 그림은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다소 추상적으로 완성이 되어 더 인기가 많았다. 다행히도 이 날 준비한 음식들이 입에 맞았는지 반응이 좋았는데 그중에서도 김치전이 의외로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다. 다음에 외국 친구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된다면 윤식당 레시피를 고려해보면 좋겠다.
친구들끼리니 집들이 선물로는 거창한 것이 필요 없다. 일본 마트에 대부분 준비되어있는 300-500엔 정도의 꽃다발을 선물하거나, 같이 마실 음료나 술을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이 날 한국의 재밌는 술 문화로 술을 섞는 비율을 그린 컵을 곁들여 야심 차게 폭탄주 코너를 준비했다. 집들이 선물로 술을 한 병씩 들고 오는 친구들 덕에 나중에 이 아일랜드는 와인과 위스키, 중국 술로 가득 차게 되었다.
작은 집에 20명 남짓한 친구들이 들어오다 보니 자연히 스탠딩 파티가 되었다. 대부분이 서양 사람이라 바닥에 앉는 게 불편할 것 같았는데, 고맙게도 카펫 위에, 나중엔 맨바닥에도 털썩털썩 잘 앉아주었다. 7월 말의 여름 날씨에 송구스럽게도 우리 집 거실에는 에어컨이 없었고 안방의 에어컨과 써큘레이터가 요란하게 돌아도 여러 사람의 열기를 재우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 때문에 테라스에 나가서 한잔씩 하는 무리도 생겼다. 한 친구는 휴대용 LP플레이어를 가지고 와서 음악을 좋아하는 무리도 모이기 시작했다. 다 같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공통의 주제로 이야기하는 한국 문화와 달리 여기서는 각자 음식과 술을 들고 흩어져서 담소를 나누는 파티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꼭 다 같이 모여 앉지 않고도, 술을 많이 마시지 않고도, 각자 편한 스타일대로 앉거나 서서 그 공간을 즐기고 있자니 나 역시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흩어져서 놀다가 몇몇 친구들이 먼저 떠난 뒤 마지막에 남은 친구들끼리 거실에 모여서 마피아 게임을 했다. 중학생 때 매일같이 운동장에서 마피아 게임을 하던 친구들은 이 게임이 이렇게나 세계적인 게임인 줄 알았을까? 어디서 유래됐는지도 모르게 이미 많은 나라의 친구들이 이 게임을 알고 있었다. 영어로 마피아 게임을 하려니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긴장감이 필요했지만, 말도 잘하고 거짓말도 잘하는 친구들 틈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즐겼다. 그 날 우리를 포함해서 두 부부가 속해있었는데, 역시 부부는 서로 너무 잘 알아서 거짓말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곤 했다. '부부는 한 몸'이라는 게 무색하게 게임 속에서는 서로를 지독하게 의심하고 몰아가는 것도 참 우스운 기억이다. 내가 마피아로 지목당했을 때 진짜 마피아든, 시민이든 나 자신을 변호할 영어실력이 짧았던 게 아주 약간의 아쉬움이었지만 말이다.
이렇게 글로 적고 나니 대단한 것은 없었지만, 그 이후의 어떤 집들이보다 열심히 준비했던 '오키나와댁의 첫 집들이'는 이렇게 마쳤다. 사실 서울에서 오키나와로 갔으니 '서울댁의 오키나와 집들이'가 맞는 표현이겠지만, 서울로 돌아온 우리는 마음의 고향 오키나와를 매일 그리기에 오키나와댁이라 해도 맞지 않을까? 하고 우리끼리 소곤소곤 얘기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