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여친

by 까나리

연애를 많이 했다. 아마 다 세어보면 양쪽 손의 손가락을 다 쓰고도 모자랄 것 같다. 3년을 넘게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는 쫓겨다니듯이 짧은 연애를 여러 번 하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또 1년 후에 이혼을 했다. 알 수 없는 힘듦에 휩쓸려 다니다가, 이러다간 안 될 것 같아 상담을 받았다. 그 해에는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이혼, 이직, 이사, 11년을 키운 강아지의 죽음. 너무 많은 일들이 휘몰아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일단 상담을 가면 이 중 하나라도 정리되지 싶었다.


상담실에 앉았는데, 내 입에서 나온 건 이혼 얘기가 아니라 3년을 넘게 만난 남자친구 이야기였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화장이 엉망진창이 되면서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나 아직도 거기에서 못 벗어나고 있었구나. A(라고 칭하겠다)는 내가 석사생이던 시절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만났다. 그는 나보다 여섯 살이 많았다. 일도 잘 하고, 친절하고, 매일 달리기를 하던 그는 옆 학교의 법대를 나왔다고 했다. 오랫동안 사법고시를 준비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의아했던 것 같다. 이 사람은 여기에서 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 가끔은 자기가 백화점에서 사탕 판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앞치마랑 토끼 머리띠 했던 사진 같은 것들을 파트너들한테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이게 뭐냐고 까르르 웃었다.


어느날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다같이 술을 마시면서, 나는 엄마랑 같이 사는 것의 힘듦에 대해 이야기했다. 엄마는 태양 같은 존재라고. 가까이 있으면 타 죽고 멀리 있어야 따뜻하다고 내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A가 눈물이 고인채로 말했다. “태양이 없으면 추우니까, 있을 때 잘 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그에게는 엄마가 없구나, 정도만 추측할 수 있었다. 학교와 멀지 않은 곳에 살던 그는 로스쿨 준비를 한다면서도 내가 밥 먹자고 하면 나오고, 커피 마시자고 하면 나오고, 술 마시자고 하면 나왔다. 그러다가 어느날에 내가 사귀자고 했다. A가 거절했다. 본인은 로스쿨에 갈 거고, 그러면 시간도 없을 거고 우리는 멀어질 거라고 했다. 끽 해봤자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그 때 일이잖아. 왜 지금 걱정하지? 그리고 멀어질지 아닐지를 어떻게 알지? 실제로 그렇게 물었다. 그는 ‘넌 뭘 모르는구나’ 하는 표정으로 대부분 다 그렇게 되더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며칠이 지나자, 그가 만나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게 됐다.


애인에 대한 배려라고는 좀체 몰랐던 나는 그를 들들 볶고 싸우면서 1년을 보냈다. 대부분은 그냥 그가 나에게 맞춰주지 않는다는 이유였던 것 같다.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그 때의 나는 정말 최악이었다. 1년이 지나자 우리 둘은 서로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아니다 틀렸다. 그가 일방적으로 나에게 익숙해졌다. 우리는 매일같이 딱 붙어다녔다. 그는 LEET를 보고, 로스쿨에 지원했고, 떨어졌다. 그 사이에 나는 그의 엄마는 그가 사시에 연이어 떨어지고 군대에 가있는 동안 췌장암을 앓다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그에게 나는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일하는 친구를 연결해줬다. 간간이 정책연구집이 발간될 때 그의 이름이 보조연구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캔디를 파는 것보다는 변호사가 되었을 때도 그 편이 조금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2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그의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그에게 꼭 법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아빠는 매해 가을이 될 때마다, 감을 좋아하는 우리 아빠를 위해 우리집에 최상급의 진영단감을 한박스씩 보내줬다. 그는 여전히 개발원의 외주 아르바이트를 간간이 하곤 했다. 그는 또 LEET를 보고, 로스쿨에 지원했고, 떨어졌다. 그쯤의 그는 내내 스스로를 낭인이라고 불렀다. 사시도 떨어지고, 로스쿨도 계속 떨어지는 낭인이라고. 괴로워했던 것 같다. 좀처럼 자신에 대한 표현을 하지 않던 그가 “나도 힘들어요!”하고 말할 때조차 나는 여전히 나밖에 몰랐다.


2년이 지나고 나는 석사를 수료하고, D시에 취업했다. 여전히 서울에서 LEET 공부를 하는 그에게 나는 “나와 결혼을 할 생각은 있냐”고 다그쳤다. “네가 나와 미래를 생각한다면 계속해서 그것에만 집착하는 게 이상하다. 로스쿨 가서,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면 마흔일 거 아니냐. 나는 너랑 5~6년을 연애하고 결혼할 생각은 없다.”라고 잘라 말하는 내게 그는 “법조인이 되는 건 우리엄마 유언이에요...”라고 했다. 거기에 대고 나는, “유언은 유언일 뿐이에요!”라고 했다. 그의 상처받은 얼굴이 마음에 박혔다. 상담사에게 이 얘기를 하면서 폭포수마냥 울었다. 내가 그를 너무 이해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못된 말을 했고 그게 계속 마음에 남아있다고. 상담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건 까나리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냥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죠.”라고 했다. 면죄부를 받은 기분이었다.


어쨌든 그는 세 번째 LEET를 보고, S시에 있는 로스쿨을 가게 됐다. 인생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로 회사를 다니게 된 나는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마나 없었냐면... 그가 오늘 자신이 학교에서 먹은 점심과 저녁 사진을 보내둘 때, 자기가 좋아하는, 우리가 같이 즐겨 듣고 함께 페스티벌도 갔었던 DJ의 노래 유투브 링크를 보내두었을 때, 매일같이 가는 로스쿨 열람실에서 자신의 자리를 찍은 사진을 보낼 때, 읽고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답장을 하지 않은채로 이틀, 삼일, 일주일이 지나도 그에게는 똑같이 메시지가 와있었다. 일어나서, 수업 듣고, 점심을 먹고, 열람실에 가있는 사진. 맞다. 나는 정신이 없었던 게 아니라,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로스쿨생의 하루에 공감하지 못했다. 아니다, 또 틀렸다. 공감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즈음 우리는 만남의 횟수가 뜸해졌다. D시에서 S시를 오가는 버스는 하루에 딱 두 번 있었다. 가끔은 금요일 늦게까지 술을 먹고 들어온 내가 서울에서 만나기로 한 주말 약속을 취소하기도 했다. 참다못한 그가 “까나리는 매일 술은 마시면서 두 달 만에 나 만나는 건 힘들어요?”라고 할 때까지. 놀란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서울로 달려가서 사과하고 데이트를 하고 오기도 했다.


그뿐이었다. 여전히 나는 그가 보내는 매일의 일과에 답장하지 않았다. 나는 가끔 다른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 집에서 자고 오기도 했다. 빤하게 호감을 보이는 남자들은 로스쿨에 다니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나에게 함부로 만나자고 말하지 못했다. A는 여전히 로스쿨 1학년이었다. 뭐가 맞고 틀린지 하나도 모르겠는채로, 술과 일에만 취한채로 몇 달을 보냈다. 나는 마침내 A에게 더 이상 너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A는 시간을 좀 가져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알겠다고 하고 처음에는 매일 오던 그의 연락이 오지 않는 것이 내심 서운했지만, 금방 잊혀졌다. 한 달 뒤 나는 잘 지냈냐는 말과 함께, 우리 이제 그만하는 게 좋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게 다였다. 길에서 그 메시지를 보내고 알겠다, 잘 지내라는 답변을 받은 나는 꺽꺽대며 울었다. 내가 왜 우는지도 알 수 없었다. 4년에 가까운 시간을 내가 그토록 의지했던 사람이 곁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이, 그래도 나는 잘 지낼 거라는 사실이 서러웠던 것 같다.


그는 그 이후에 한 번 ‘까나리, 나보다 잘 생기고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잘 사는 남자 만나서 잘 지내요.’ 같은 문자를 보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그 문자에 답변을 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나는 그런 것 때문에 헤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냥 헤어질 때가 된 것 같아서 헤어지자고 하는거에요. A도 잘 지내요.’라고 답장했다. 하루 정도는 마음이 아렸지만, 술을 마시고 다른 남자들을 만나다보면 곧 또 잊혀졌다. 그즈음 나는 엄마와 싸움이 잦았다. 엄마는 나에게 “너 A랑 헤어졌냐, A만큼 좋은 사람 또 만날 자신 있냐”는 말을 했다. 언제는 나이도 많고 직업도 없어서 마음에 안 든다며. 그 해 가을에도 어김없이 단감 한박스가 집에 도착했다. 나는 A에게 “A, 우리 집에 감이 또 왔어요. 이제 아버지한테 우리 더 이상 안 만난다고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온 감은 잘 먹을게요.”라고 문자를 보냈다. 뭐라고 답장이 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후에도 그는 내 꿈에 자주 나왔다. 어떤 날은 아파하면서, 어떤 날은 즐거워하면서, 어떤 날은 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실루엣만 남은 채로.


이혼 후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한 나는 여의도에서 오랜만에 개발연구원에 다니는 친구를 만났다. A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피스가에 위치해서 문을 일찍 닫는 스타벅스에 그 날 저녁에는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친구와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국회에 출장이 있던 날, 보좌관으로 일하는 A의 법대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H라고 하자). H는 만나자마자 나에게 “너, 혹시 전에 여의도 스타벅스에 온 적 있지 않아?”라고 물었다. 미처 기억을 하지 못한 나는 “아니, 없는데? 누굴 본 거에요 오빠?”하고 웃었다. “아냐, 분명히 너였어. 너 창가에 앉아있었잖아.” 그제서야 생각났다. “아! 맞다! 나 친구 만나느라. 근데 오빠 어떻게 알았어요?” 묻는 나에게 H는 “나 그 때 너 맞은편 뒤쪽 테이블에 앉아있었어. A도 같이. 아마 A가 널 봤는데 못 본 척 한 것 같아.”라고 했다. 마음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그 정장 무리 중에 A랑 H가 있었다고? 전혀 몰랐다. 신기하다고 하고, A와 헤어진 후 힘들었다고 말했다. H는 “A는 지금 로스쿨 면접 때 만난 친구랑 사귀고 있어. 서초동에서 일하고 있고. 너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A는 어땠겠니. 걔도 엄청 힘들어했어.”라고 했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H는 이 말을 덧붙였다. “나는 너랑 A가 같이 있는 게 참 좋아보였거든.” 몇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우리는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서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해봤다. 이제는 변호사가 된 그의 이름을 한 법무법인 홈페이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력에 써진 한 줄에 눈길이 멈췄다.








“2016-2017 한국개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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