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좀 독특하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책인데, 책 속에는 글씨가 없다. 빈 책이다. 글 대신 우스꽝스럽게 생긴 캐릭터가 저마다 다른 표정과 움직임으로 책 속에 간혹 나타날 뿐이다.
책의 표지에 구미가 당겼다. 'one은 당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꿈과 아이디어를 써 내려가는 책. 당신 안에 있는 생각을 꺼내어 글로 표현한다면 지금까지 꿈으로만 간직해 온 일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올 거예요. one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미래가 담겨있는 책.'
지금은 유사한 콘셉트의 책들이 있지만 2004년 당시는 파격적이었다. 하얀색의 innocent(순결)과 빨간색의 Passion(열정) 두 가지가 있었다. 22살의 나는 빨강(red)을 택했다. 빨간색의 선택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었다. (그때 흰색을 택했다면 지금 내 인생은 좀 다를 것 같다.)
마코토 오사나이 작가의 one
22살의 내가 써나간 책의 첫 페이지를 읽자마자 머리가 띵~하다.
"나는 작가다. 이제 곧 베스트셀러를 지어낼 작가" "나를 이 위치에 오를 수 있게 옆에서 도와주신 부모님, 친구, 선생님, 살아오면서 많은 깨달음을 주신 분들께 더불어 감사드린다."
그로부터 자그마치 17년이 흘렀다. 그리고 난 회사 원(one)이 되었다.
10량 지하철 문에서 쏟아져나오는 사람중하나(one)
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는 뒷모습 중하나(one)
저마다 목적지가 다른 경보 경주에 참가하는하나(one)
그래도 다행인것은
자그마치 17년이나 일기를 쓴 회사 원이었다. 내 청춘의 역사가 담겨 있기에 너무 소중하다. 이렇게 써 내려간 일기장은 5권이었다. 소소한 삶의 이야기들, 삶의 가르침이 빼곡하다.
그런데, 왜 아내는 그 일기장을 찢었을까?
17살 일기장은 그렇게 꽃다운 생을 마감했다.
일기장은 내 인생의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존재였다.
...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절망했다. 화도 났다. 하지만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난 아내가 되어 일기를 써봤다.
남편만 믿고 난생처음 가보는 도시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두근거리고 떨렸다.
첫째가 태어나 기뻤다. 하지만 육아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하루 종일 남편만 기다렸는데 남편은 상사 눈치를 보느라 오늘도 회식이다. 나쁜 놈
남편은 나를 남겨두고 해외에 일 년 동안 파견을 갔다. 아이가 열이 떨어지지 않아 3일 동안 입원을 했다. 너무 힘들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던 시절이 그립다. 친구들도 보고 싶다. 남편은 친구들과 스크린 골프를 친다고 한다. 대가리를 쳐버리고 싶다.
수도권으로 이사를 와서 다시 직장을 잡았다. 꿈의 실현인가? 둘째 임신을 했다. 기쁘지만 직장을 다시 그만둔다. 남편이 밉다.
둘째는 엄마를 닮은 아들이다. 남편은 동종사 모임이 있다며 주말에 산에 갔다. 미친놈
아내는 내가 소중해하는 것을 찢어버렸다. 내가 아내로부터 가장 소중한 것을 찢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내를 얼마나 힘들게 했을까?
난 내 인생만 소중한 이기주의자였다. 아내는 일기장 종이를 찢었지만, 난 젊은 날 아내 인생을 힘들게 했다 반성했다. 난 회사일에 목을 매고, 이 시대를 살아온 죄인 남편이자 아빠였다.
늘 서로가 더 힘들다고 고함을 치던 그때, 난 왜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미안했다.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가 없다. 난 그래서 평생 아내 말을 잘 듣기로 했다. 그래서 요즘은 아내와 산에 같이 다닌다.올해 목표는 "아내의 이야기를 많이 듣기"이다.
어느 날, 아내는 말없이 내게 새로운 일기장을 선물했다. "쓰다."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는 일기장
이제는 아내도 일기를 쓴다. 우리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드라마를 쓴다.
김치 싸대기 막장 드라마에서 하루하루 에피소드가 있는 가족드라마로 장르가 바뀌고 있다. 곧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되겠지.
'나 혼자 산다' , '1호가 될 순 없어'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우리는 드라마를 쓴다.
그리고 난 이제 브런치에 글을 쓴다.
혹시 아내가 찢을 수 없게. 쿄쿄쿄
오늘은 그(그녀)가 되어 일기를 써보세요. 그러면 거짓말처럼 당신 마음이 편안해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