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넘게 아침 운동을 다녔더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제주도까지 왔는데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나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보다. 새벽 5시가 되니 어김없이 눈이 떠졌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숙소를 나섰다.
제주도의 아침은 원주랑 다를 것은 없었다. 바다의 짠 냄새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숙소는 동문시장의 번화가 쪽에 있었는데 숙소를 나온 시간에는 정말 고요했다. 차들은 거의 다니지 않고 거리에는 큰 가로등 말고는 불이 대부분 꺼져있었다. 시장 안쪽에서 당일 판매할 물건을 도매로 떼와서 정리하는 몇몇 가게도 보이긴 했다.
원주에서는 걷는 코스가 정해져 있었는데 제주도는 생전 처음이라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볼까 지도를 살펴보다가 해안가 쪽을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해안가 방파제 쪽은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그물로 벽 같은 것을 설치해 놓아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걷기는 힘들었다. 방파제를 지나서는 수산 시장이 크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곳은 동문시장 쪽과는 다르게 이른시간에도 사람들이 싱싱한 생선을 사고자 북적거리고 있었다. 생선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나오는 정겨운 큰 소리에 고요했던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넘치는 활기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계절이 바뀌면서 해가 뜨는 시간도 늦어져서 해안가를 한번 왕복하고 숙소에 돌아올 때쯤이 되어서야 해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 기대를 했던 조식을 먹으러 숙소 5층 주방으로 갔다. 시리얼과 빵, 바나나가 준비되어 있었고 냉장고에는 우유와 물들이 가득했다. 준비되어 있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셀프여서 시리얼 한가득과 빵 몇 조각으로 배를 채우고 깨끗이 설거지를 해 놓은 다음 버스 투어 갈 준비를 했다.
렌터카를 빌리려다가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서 제주도 주요 관광지를 도는 버스 투어를 신청했었다. 관광의 명소인 만큼 볼 데가 많은 제주도 전체를 여행하기에는 시간이 없었기에 여러 가지 코스 중 주로 제주도의 동쪽을 도는 버스 투어를 선택했다. 출발 시간이 꽤 일찍이라 평소 출근하기 위해서 준비하던 시간보다 더 부지런히 준비해야 했다. 덕분에 탑승 장소에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었다. 투어 전 탑승 지역이 여러 군데라서 오전 9시 되어서야 본격적인 출발을 할 수 있었다. 몇 년간의 버스 투어 진행으로 말솜씨가 매끄러워진 버스기사님께서 굉장히 부드럽고 간단하게 오늘 방문할 장소들을 이야기해주셨다. 버스는 그렇게 첫 번째 코스로 달려갔다.
안동 오름 (비밀의 숲)
안동 오름 '비밀의 숲'
안동 오름 - 비밀의 숲으로 가면서 버스 기사님께서 제주도에는 많은 작은 산들이 있는데 이것을 '오름'이라고 한다고 하셨다. 제주도 중심 쪽으로 들어가니 언덕 같은 오름들이 수 없이 눈앞을 지나갔다. 저런 숲들이 많이 있다는 건 사람의 손길이 덜 탔겠다, 생각이 들었다. 1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비밀의 숲은 작은 규모의 숲이었지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숲길에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으면 멈칫거리거나 그 자리를 재빨리 피하느라 신경이 많이 쓰이긴 했다. 푸른 숲은 사람들이 와서 무엇을 하든 마음에 평화로움을 가져다주기 위해 마스크로 가린 콧 속으로도 상쾌한 바람을 불어다 주었다.
보름왓
'보롬왓' 온실 정원
'보롬왓' 맨드라미 꽃밭과 깡통 기차
따뜻한 온실 정원을 지나 카페를 나오면 노란색, 빨간색 맨드라미가 언덕을 잔뜩 덮고 있는 다른 세계에 도착한다. 꽃밭이 있는 곳은 단순하면서도 색감이 진해서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사람들은 꽃밭 사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햇살은 뜨거웠지만 사람들의 사진 찍는 열정은 멈출 수 없었다. 왠지 일생 마지막으로 왔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뜨거운 집념이라고 해야 할까.
보름왓에서 운영하는 카페에서 햇빛에 달구어진 몸을 식혔다. 카페의 음료 가격이 기본적으로 비싸긴 했지만 (당근 주스 작은 병 하나에 7,000원이었다.) 출입료라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해가 점점 솟아오르면서 제주도의 기온도 솟구쳐 올랐다.
성산일출봉
투어의 다음 코스는 성산일출봉이었다. 기사님께서 점심 먹을 시간을 고려해서 성산일출봉에 올라가는 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주변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시간이 되면 성산일출봉 아래쪽에서 해안가를 볼 수 있는 무료 산책로를 제안하셨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성산일출봉 위에서 일출을 보는 것을 버킷리스트로 꼽을 만큼 유명한 곳인데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자주 올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멋진 곳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을 투자해서 성산일출봉을 오르기로 했다. 오르기 전 등산 시간을 물어보려고 들린 안내소에서 직원분이 성산일출봉을 풍경을 사진 한 장에 담는 건 어렵겠지만 사진으로도 담고 눈으로도 꼭 담고 오라고 하셨다. 왠지 더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성산일출봉
성산일출봉 위에서 보이는 바다
30분 정도 친구와 천천히 올라간 성산일출봉 정상에서는 이곳보다 높은 곳이 주변에 없어 탁 트인 자연경관과 제주도의 전경을 일부분 볼 수 있었다. 바다가 하늘과 희미한 경계선을 그리고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성산일출봉 근처 마을들이 한눈에 보였다. 도시 중간에 오름들도 수줍게 서 있었다. 안내소 직원분이 말씀하신 대로 사진으로 담길 수 없는 광활한 자연이 주는 상쾌함이 도시 속 건물들 사이 나만의 세계에서 벽을 치며 살던 우리 마음을 깨뜨려주는 것 같았다. 바다를 보는 것도 너무 좋고 오름들과 어울려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위대한 자연과 공존해서 산다는 것이 부러웠다. 내려가면서 보이는 얕은 바닷가 쪽은 바닥이 다 보일 정도로 맑았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라 더럽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보존을 잘해놓았다. 예상치 못한 맑은 물을 보고 있으니까 내 마음도 정화되는 것 같았다. 이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던 시간을 투자한 만큼 점심을 먹을 시간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삼각김밥과 라면을 뱃속에 욱여넣고 버스에 탑승했다.
섭지코지
섭지코지에 유명한 포토존이 있다고 했다. 반지 모양의 큰 조형물에서 바다 풍경을 배경으로 찍을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이번 코스에서는 버스 기사님께서 직접 안내해서 사진도 찍어주시겠다고 하며 같이 내리셨다. 우리는 이번엔 근처 카페에서 쉬기로 했다. 성산일출봉에 오르느라 체력도 소진했고 더위에 약한 편이라 제주도의 햇살을 잔뜩 머금고 나니 기운이 빠졌다. 시원한 음료를 마시면서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함덕 해수욕장
현무암이 가득한 함덕 해수욕장
곱고 하얀 함덕 해수욕장의 모래장
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함덕 해수욕장이었다. 바닷가는 제주도의 특징인 현무암이 가득했다. 유독 새카만 돌들이 하늘색 바다와 어울려서 단단한 존재감을 드러나고 있었다. 해수욕장 근처에 위치한 카페에는 더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시기는 가을이 올 때인데 여름이 늦장을 피우면서 자리에서 비켜주질 않았다. 해가 지면서 해변가의 모래들이 색다르게 반짝였다. 전에 갔던 강릉의 해변가와는 다르게 좀 더 곱고 하얘서 부모들과 온 아이들이 모래성을 짓고 노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늦은 오후였지만 더운 열기가 아직 가시진 않았기에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면서 노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루 종일 투어를 다니면서 바다를 보니 푸른 기운이 몸속에 녹아들어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긴 하루가 지나고 버스에서 하차해서 숙소에 들어왔다. 일상에서 벗어나 완전 다른 지역에서 일상과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 또 다른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하루 마무리를 위해 제주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시원한 맥주 한잔에 곁들인 차가운 파스타 샐러드와 스테이크 그리고 매콤한 토마토 파스타. 내일을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음에 감사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