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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만나 바샤커피,
향이 만든 궁전

아주 특별한 선물

by hongrang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이 결혼을 했다. 신혼여행지로 선택한 곳은 두바이였다. 화려한 빌딩과 이국적인 사막의 풍경을 배경으로 며칠을 보내고 돌아온 그들은 작은 상자를 내 손에 건네주었다. 반짝이는 금빛 포장 속에 담긴 것은 바샤커피였다. 순간 나는 직감했다. 여행에서 길어 올린 기억과 시간의 잔향을 함께 전해주는 선물이라는 것을. 그들이 전하고 싶었던 두바이의 공기와 낯선 도시의 온도가 포장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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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커피는 모로코 마라케시의 궁전, '*다르 엘 바샤'에서 이름을 빌려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싱가포르에서 2019년 태어난 비교적 젊은 브랜드다. 포장에 새겨진 1910이라는 숫자 또한 이 브랜드의 탄생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다르 엘 바샤 궁전이 세워진 해를 기호처럼 차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바샤커피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허구와 진실이 겹쳐지는 그 틈새에서, 존재하지 않는 과거가 현재의 감각으로 불려 올라온다. 바샤커피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없는 시간을 있는 것처럼 믿게 하고, 현실을 허구와 엮어 감각의 이야기로 재탄생시키는 것.


그렇게 아끼고 아껴 보관해 오던 커피를 가을비 내리는 추석연휴 오후에 포장을 뜯고 커피백을 꺼내는 순간, 작은 방은 순식간에 다른 공간으로 변했다. 커피 향이 밀려 나와 공기를 덮었고, 그 향은 벽과 천장, 책상 위의 사소한 물건들까지 스며들었다. 나는 그저 봉투를 뜯었을 뿐인데, 발걸음을 옮겨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아마도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가향커피의 파괴적인 경험이었다. 눈을 감자 청담동의 매장도, 두바이의 라운지도 아닌, 더 오래된, 보이지 않는 궁전의 살롱이 눈앞에 그려졌다. 바샤의 경험은 바로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커피가 잔에 담기기도 전에 이미 향은 기억을 점령하고, 후각과 상상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공간을 재구성한다.


바샤커피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맛보다 향을 앞세운다. 사람들에게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향을 마시는 경험을 선사한다. 딸기 크림, 바닐라, 캐러멜, 초콜릿… 가향된 노트들은 서로 겹쳐지며 하나의 풍경을 그린다.


내가 맛본 것은 그중에서도 ‘아이러브 파리(I Love Paris)’였다. 바샤의 수많은 도시 시리즈 중 하나로, 밀라노, 이스탄불, 사하라, 아프리카와 같은 이름들이 붙은 커피 중에서 나는 파리를 선택했다. 이 커피는 아라비카 원두로 만들어져, 은은한 과일향과 고소한 너티함이 함께 번졌다. 설명에는 “마치 파리의 거리를 걷는 듯한 느낌”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아직 파리를 가보지 못한 나에게 그것은 상상의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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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싶었다. 이 커피의 초콜릿 같은 너티함은, 프랑스의 디저트와 빵의 나라를 상징하는 풍경을 닮았다. 빵집 앞을 스칠 때 코끝을 간질이는 고소한 향, 갓 구운 크루아상의 겹겹이 퍼지는 냄새. 하지만 현실 속에서 내가 경험한 가장 가까운 장면은, 초가을 이른 아침 파리바게뜨 앞을 지나갈 때 풍겨오는 향긋한 빵 냄새였다. 차가운 공기를 뚫고 나에게 다가오는 폭력적인 향기, 아직 가보지 못한 파리를 대신해, 나는 그 친숙한 향에서 이 커피가 전하려는 도시의 감각을 떠올렸다. 결국 ‘아이러브 파리’는 나에게 가본 적 없는 도시를 향기로 여행하게 만드는 작은 비행티켓이었다.


한국에도 이제 바샤커피 매장이 들어섰다. 청담동의 플래그십 스토어, 백화점 안의 부티크. 아치형 천장, 황금빛 장식, 이국적인 조명이 더해진 그 공간은 여행의 무대처럼 설계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커피를 주문하는 순간조차 작은 의례가 된다. 하지만 나에게는 화려한 매장보다, 신혼여행의 선물로 건네받은 작은 커피백 하나가 더 큰 기억으로 남아 있다. 금빛 포트도, 고풍스러운 공간도 없었지만, 단지 향 하나만으로도 내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테이크 아웃잔의 그 화려한 구성은 1만 원 이상의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브랜드의 철학이 이렇게도 명확히 전해질 수 있을까. 많은 브랜드들이 전통과 고급스러움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감각으로 번역해 내는 데는 실패한다. 그러나 바샤커피는 다르다. 왕가의 서사를 빌려와 커뮤니티의 향으로 풀어내고, 그 향을 일상의 한순간을 바꾸는 의례로 만들어버린다. 봉투를 뜯는 행위조차 작은 의식이 되고, 봉투 속의 원두는 궁전의 커피하우스 공기처럼 확장된다. 포트에 담긴 한 잔의 커피가 아니라, 그 잔을 준비하기 전의 순간부터 이미 경험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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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바샤커피는 나에게 하나의 경험으로 남았다. 커피라는 액체가 아니라, 향으로 지어진 궁전으로. 선물을 건네던 지인의 웃음과 함께, 나는 두바이의 뜨거운 햇빛과 마라케시의 그림자를 동시에 떠올렸다. 시간이 흘러도 그 순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바샤커피는 나에게 커피 한 잔이 아닌, 기억으로 남는 의례를 선물했다. 그리고 나는 그 향을 들이마실 때마다, 여행과 사랑, 그리고 오래된 궁전의 공기를 다시 한번 마음속에 불러온다. 다시금 이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선물이라고 지인에게 안부전화라도 돌려야겠다.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아름답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18세기 프랑스의 정치가 탈레랑



*다르 엘 바샤 - 1910년, 마라케시의 권력자 타미 엘 글라우이가 세운 다르 엘 바샤 궁전은 ‘바샤의 집’이라는 이름처럼 권력과 사교의 중심지였다. 전통 모로코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중앙 안뜰, 분수와 정원, 정교한 모자이크 타일과 목조 장식이 어우러져 궁전의 화려함을 드러낸다. 프랑스 보호령 시절에는 윈스턴 처칠, 루스벨트, 채플린 같은 인물들이 머물며 정치와 문화가 교차하는 무대가 되었다. 오늘날 이곳은 커피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세계 각지의 커피 문화를 소개하며, 문화적 교류의 장소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일부 이미지는 AI를 통해 제작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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