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외국에 꼭 한 번쯤은 살아보고 싶었다. 단순히 잠시 머물다 가는 방문자가 아니라 거주자로서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이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당최 가늠이 안 갔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유학을 꿈꿨지만 내가 가진 전공 공부의 끝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계산을 돌리니 답이 나오지 않아 포기했다. 그렇게 대안을 찾은 것이 워킹홀리데이였다.
2020년 1월 1일 올해는 기필코 호주로 나가겠다는 장대한 포부를 SNS에 적어 올렸다. 늘 꿈꾸던 계획이 어처구니없는 일들로 파괴당하는 삶의 연속이었는데 여지없이 이번에도 듣도 보도 못한 역병이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하더니 끝내 나의 2020 플랜을 박살 낸다.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고 호주는 외국인들의 출입을 막고 아직 풀지 않고 있다. 정말 이 코로나 팬대믹은 역사에 큼지막하게 기록되겠지만 내 개인사에선 밑줄 쫙쫙 그어 삭제하고만 싶은 심정이다.
꼭 해야겠다 마음먹은 일이 강제로 덧없이 미뤄지니 삶은 살아가기보단 버티기가 되고 그 늘어져 가는 시간 속에 불안이란 공허는 삶에 뭐라도 계속 꾸역꾸역 밀어 넣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한다. 어쨌든 난 20대를 잘 매듭지어야만 하는 나이니까. 그러나 이 사태는 내 부서진 계획쯤은 우스울 정도로 수많은 사람의 삶과 생계를 내동댕이쳤다. 자영업자들의 한숨은 길어지고 취업 문은 더 좁아졌으며 실직한 사람들의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불행과 고통에 우열은 없다지만 혹시나 내 걱정조차 사치로 보일까 싶어 주변인에게 신세 한탄하기조차 눈치가 보이는 시대라니. 반지하 자취방에 살면서도 바닥 밑에 지하가 있다는 것을 잊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오히려 호황인 업종도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배달 대행이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가 격상될 때마다 식당과 카페의 출입은 제한되었고 그동안 배달을 하지 않던 식당과 카페 심지어 PC방까지 생계를 위해 배달 시장에 뛰어들었다. 각종 연말 연초 모임은 취소됐고 점차 재택근무와 화상 수업마저 늘어나니 집에 상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달 음식 수요량이 급증했고 사회적으로 아직까지 인식이 좋지 않은 배달 기사들이 적어도 일터에서만큼은 귀한 몸이 되었다.
그래도 대학을 졸업한 나와 다르게 형은 중학교 3학년의 나이에 시작한 주유소 알바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하며 투잡이 일상인 사람이다. 또한 그중엔 퀵과 배달일도 있었다. 그런 형에게 이 사태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였고 형은 물 만난 고기마냥 여러 플랫폼을 옮겨 다니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아니 정말 말 그대로 쓸어 담기 시작했다. 연봉 1억 배달원의 이야기가 기사에 올랐을 때 말도 안 되는 이야기겠지 하며 콧방귀를 꼈는데 그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 속 인간이 바로 내 옆에 있었다.(그러나 엄밀히 연봉 1억은 아니다. 코로나+겨울 특수로 두 세달 한정이다. 또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루 12시간 이상 주 7일을 일해야 하며 형은 수년간의 배달일로 다져진 인간 내비게이션 그 자체다)
그런 형을 보고 나도 짧게라도 배달 일을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하던 자격증 공부는 슬럼프가 왔고 지루한 일상에 글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며 핸드폰 속 즐비한 콘텐츠들에 밀려 책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이나 바짝 모아보자! 그렇게 나는 가을과 겨울 사이 아스팔트 위 초보 배달러가 되었다.